1980년 5월, 광주에서는 열흘간의 항쟁이 벌어졌다. 5·18 민주화운동이다. 1979년 10·26 이후 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커졌지만, 12·12 군사반란으로 군의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며 권력 장악에 나섰다. 이에 맞서 학생과 시민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왔고, 계엄군은 강경 진압으로 맞섰다.
광주는 곧 외부와 단절됐다. 그곳에서 벌어진 참상을 알리는 것조차 죄가 되던 시절이었다. 같은 시기 대구에서도 대학생들이 거리로 나왔고, 광주의 진실을 전하려던 시민들은 '유언비어 유포자'로 몰려 군법회의에 섰다.
광주를 무력으로 진압한 신군부는 이후 '정화'와 '숙정'이라는 이름으로 통제를 사회 전반으로 넓혀갔다. 민주화를 향한 열망과 이를 억누르려는 국가폭력이 충돌했던 1980년이었다.
◆열흘간의 항쟁, 5·18 민주화운동
박정희 대통령 사망 이후 대학가를 중심으로 비상계엄 해제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신군부는 이에 맞서 언론 통제와 강경 진압을 준비했고,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해 학생과 정치인 등 민주화 세력을 대거 체포했다.
광주에서는 저항이 이어졌다. 5월 18일 전남대학교 앞 학생 시위를 계엄군이 강경 진압하면서 시민들까지 거리로 나섰다. 20일에는 대규모 차량시위가 벌어졌고, 21일 전남도청 앞에서는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시민들은 인근 무기고에서 총기를 가져와 무장했고 계엄군과 맞섰다.
계엄군이 시 외곽으로 물러난 뒤 광주는 고립됐다. 시민들은 전남도청을 중심으로 자치질서를 유지하며 헌혈과 주먹밥 나눔 등에 나섰다. 하지만 27일 새벽 계엄군이 다시 광주에 진입해 시민군을 진압하면서 열흘간의 항쟁은 막을 내렸다.
5·18은 전두환 정권 아래 오랫동안 '폭동'으로 왜곡됐다. 이후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요구가 이어졌고, 1997년 5·18은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2011년에는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대구에서 진실을 알린 사람들
1980년 5월 민주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은 대구에서도 거셌다. 5월 14일 경북대와 계명대, 영남대 등 대학생들이 비상계엄 해제와 신군부 퇴진을 요구하며 도심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튿날 계명대에는 전국 대학 가운데 처음으로 무기한 휴교령이 내려졌다.
사흘 뒤 광주에서 5·18이 시작됐지만 언론 통제로 현지 상황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때 광주의 진실을 대구 시민들에게 전하려 한 이들이 두레양서조합 회원들이었다.
광주의 참상을 전해 들은 회원들은 '대구시민에게 알립니다'라는 제목의 유인물 5천부를 제작하고 시위를 준비했다. 그러나 27일 계엄군의 무력 진압 소식이 전해지자 계획을 취소하고 유인물을 소각했다.
그해 9월 두레서점이 급습당했고 회원들이 잇따라 연행됐다. 정상용 씨는 반월당 인근 다방에서 "광주가 피바다가 됐다"는 취지의 말과 광주 상황을 알리는 유인물을 제작했다는 이유 등으로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1980년 12월 정 씨에게 징역 2년이 선고되는 등 관련자들은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처벌받았다.
하지만 42년 뒤인 2022년 대구지법은 재심에서 정 씨 등 두레사건 관련자 5명에게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계엄포고 자체가 헌법과 법률에 위배돼 무효라는 판단이었다. 두레사건은 광주와 대구가 민주화라는 가치 아래 연대했던 초기 사례로도 평가받고 있다.
◆총칼 다음은 '정화'였다
광주를 진압한 신군부는 곧바로 권력 장악에 속도를 냈다.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전두환이 상임위원장을 맡았다. 이후 '숙정'과 '사회정화'라는 이름의 조치가 잇따랐다.
7월 30일에는 과외 금지와 졸업정원제를 골자로 한 교육개혁조치가 발표됐다. 8월에는 공무원 8천687명이 숙정됐고, 폭력·사기·밀수·마약 등을 '사회악'으로 규정한 특별조치가 시행됐다.
대표적인 것이 삼청교육대였다. 신군부는 '사회악 일소'를 명분으로 수만 명을 검거했고, 상당수가 정식 사법절차 없이 군부대에서 '순화교육'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가혹행위와 인권침해가 이어졌다.
통제는 언론으로도 향했다. 11월 언론기관 통폐합으로 신문·방송사가 강제로 합쳐지고 수백 명의 언론인이 현장을 떠났다. 대구에서도 12월 1일 매일신문이 영남일보를 흡수 통합하며 제호를 '대구매일신문'으로 바꿨다.
그 사이 전두환은 8월 27일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돼 9월 1일 취임했다.
1979년 10·26 이후 찾아온 '서울의 봄'은 채 1년도 가지 못했다. 1980년 봄 광주에서 총칼로 드러난 국가의 강압적 통치는 이후 '정화'와 '숙정'이라는 이름으로 학교와 직장, 언론과 일상까지 파고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