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후(箜篌)는 거문고 비파와 같은 현악기에 속해
공후는 중국 악기가 아니라 고조선에서 만들어진 우리민족 고유의 현악기
◆동아시아의 음악 선진국 단군조선
지금으로부터 4,000여 년 전 대홍수가 나서 중국이 도탄에 빠졌는데 이때 우(禹)가 치수(治水)의 공로를 인정받아 순임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하(夏)의 우왕은 신왕조의 건립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해 대대적인 행사를 개최했는데 그 내용이 『좌전(左傳)』 애공 7년 조항에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 "우임금이 도산에서 제후들과 회합을 가졌는데 옥백을 가지고 참석한 나라가 만국이었다(禹會諸侯于塗山 執玉帛者萬國)"
중국 하나라 우왕 시대는 바로 우리민족의 단군조선 시기로서 단군왕검은 태자 부루(夫婁)를 보내 도산(塗山)에 가서 회합에 참가하도록 했다. 그에 관한 내용은 조선왕조 『세종실록』에서 『단군고기』를 인용하여 이렇게 전하고 있다. "단군은 당나라 요임금과 동일한 시기에 건국했다. 우왕이 도산에서 회합을 개최함에 이르러 태자 부루를 파견하여 참석하도록 했다(檀君 與唐堯 同日而立 至禹會塗山 遣太子夫婁 朝焉)"
한양조선의 『승정원일기』 영조 46년 2월 6일 조항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임금이 말하기를, '단군 시대에 증거가 될만한 사적이 있는가.' 종수(鍾秀)가 말하기를, '7년에 아들 부루를 파견하여 하나라 회합에 참가하게 한 문헌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청사고(淸史稿)』에는 "조선이 단군으로부터 개국했는데 시기는 제요(帝堯) 25년 무진이다. 하나라의 우왕이 도산에서 제후들과 회합을 가질 때 단군이 아들 부루를 보내서 참여하게 했다"라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이상의 자료들에 따르면 단군조선의 태자 부루가, 중국 하나라 국조 우왕이 개국을 경축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에 참가했다는 것은 중국과 한국의 고대 문헌이 모두 인정하는 역사적 사실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습유기(拾遺記)』에 서주(西周)시대의 부루국(夫婁國)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온갓 연극의 음악을 갖추고 있다.(備百戲之樂)" "중국의 악부가 부루국 배우들의 기예를 전수 받았다(樂府皆傳此伎)"라고 말하고 있는 점이다.
『습유기』는 1,600여 전 남북조시대 동진 안양현(安陽縣) 지금의 감숙성 천수(天水) 출신 왕가(王嘉, 약 325~390)가 지은 책인데 그의 생애를 다룬 왕가열전이 중국의 정사인 『진서(晉書)』에 실려 있다. 정사에 열전이 실릴 정도라면 그가 당시를 대표하는 저명한 인물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자치통감』 105권에는 왕가를 가리켜서 "특이한 능력을 지니고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이 있어 당시 진나라사람들이 신비하게 여겼다(有異術 能知未然 秦人神之)"라고 말한 것을 본다면 왕가는 포박자 갈홍과 유사한 신선 도가 계통의 인물로 여겨진다.
1,600여 년 전 왕가와 같은 권위 있는 인물의 저서에서 단군의 부루국을 가리켜 "온갓 연극의 음악을 갖추고 있었다(備百戲之樂)"라고 말했다면 우리는 이를 결코 과소 평가할 수 없다. 이는 바로 단군조선이 음악 선진국으로서 중국 서주에 음악을 전파한 사실을 알려주는 문헌적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후한서』 동이전에는 하(夏)나라 임금 소강(小康) 이후에 동이의 사람들이 "음악과 무용을 헌상했다(獻其樂舞)"라는 기록이 보인다. 동이 국가에서 하나라 때 중국에 음악 무용을 헌상했다면 온갓 음악을 갖추고 있었던 단군의 부루국에서 서주국에 음악 무용을 전수해주었다는 『습유기』의 기록은 역사적인 사실과 부합된다고 할 것이다.
한양조선 『승정원일기』 영조 41년 12월 8일 조항에는 "기물과 복식의 제도가 다 단군에서 시작되었다(器服之制 皆始於檀君)"라고 말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기물(器)은 인간이 창조한 여러 문명적 도구, 기구를 지칭한 것으로서 당연히 악기도 포함된다. 이는 한양조선에서 우리나라 악기의 원류를 단군조선 시대로 파악하고 있었던 인식을 보여준다.
『증보문헌비고』 악고(樂考)에는 "기자가 동쪽으로 조선에 올 때 중국 사람 5천 명이 따라 왔는데 시서, 예악, 의무, 음양, 복서, 백공, 기예가 다 함께 왔다"라고 하였다.
단군조선에서 시작된 음악을 비롯한 여러 동이 문화는 기자의 동래를 통해서 중원의 상나라 문화와 만나 융합을 이룸으로써 보다 풍성해졌다고 말할 수 있겠다.
삼한(三韓)에서는 "비파를 타고 가무를 즐겼다(鼓瑟歌舞)"라는 기록이 중국의 여러 기록에 나타나는데 이는 우리나라 음악이 삼한에 이르러서는 매우 수준 높은 차원에 도달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최근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미국 영화계 최고 권위의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쓸었다. 골든 글로브, 그래미 수상에 이어 오스카 트로피까지 거머쥐며 케이컬처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오늘날 한국에서 만들어진 대중음악 케이팝은 이제 한국만의 음악이 아니라 세계적인 문화가 되어가고 있는데 우리의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단군조선으로부터 우리민족의 피속을 타고 수천년을 흐르는 가무의 DNA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고조선 민요 공후인(箜篌引)의 공후는 어느 나라 악기일까
김부식은 『삼국사기』 권 제32 잡지 제1 음악조항에서 신라음악, 고구려음악, 백제음악으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신라음악은 『신라고기(新羅古記)』, 『금조(琴操)』, 『석명(釋名)』, 『풍속통(風俗通)』 등 여러 책을 인용하여 비교적 상세히 설명한 반면 고구려, 백제 음악에 대해서는 두우의 『통전』을 인용하여 간단히 소개하는 데 그쳤다.
김부식이 현금(玄琴), 가야금, 비파 즉 신라의 3대 현악기 중 하나인 현금을 설명하면서 거문고 곡조를 수집하여 기록한 책인 동한의 채옹이 지은 『금조』를 인용했는데, 고조선 사람이 조선진을 무대로 창작한 가요 공후인이 바로 이 책에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김부식은 『금조』를 인용하여 신라의 현금을 설명하면서 거기 함께 수록된 고조선 민요 공후인에 대해서는 쏙 빼놓고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공후인을 짧게라도 인용했더라면 고조선 민요가 한국 고대 문헌에는 수록되지 않은 수모를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때 김부식이 인용한 『신라고기』라는 책도 책명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비단 현금의 제작 과정뿐 아닌 『삼국사기』에 전하지 않는 수많은 신라의 옛 정보들이 담겨 있었을 것인데 지금 실전되어 전하지 않는 것이 몹시 안타깝다.
『삼국사기』 신라음악 조항에는 공후가 보이지 않지만 고구려와 백제의 음악 부분에는 모두 공후가 고유한 악기로서 기재되어 있다. 이는 고구려 백제가 지리적으로 고조선을 직접 계승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공후(箜篌)는 거문고 비파와 같은 현악기에 속한다. 공후인은 고조선 시대에 조선하 나루터에서 공후라는 고대 현악기를 타면서 고조선인이 지어 부른 노래다. 그러면 이 공후라는 고대 현악기는 과연 어느 나라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것일까.
◆공후를 중국 한나라 악기로 본 이병도의 주장
이병도는 『한국고대사연구,1979』 낙랑군고에서 "공후와 같은 한(漢)의 악기가 유행하여 하층사회의 부녀들 중에도 명탄수(名彈手), 명창자가 있었다는 것과 당시 한의 문명이 우리 토착 사회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쳐주었는가 등을 상상케 한다"라고 말하였다.
이병도는 공후를 중국 악기로 보았고 고조선 사회에서 이를 받아들여 하층사회에까지 널리 유행한 것은 중국 한 문명이 고조선 사회에 끼친 지대한 영향을 반영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북한의 리지린은 이와 의견을 달리했다. "공후를 타면서 불렀던 공후인이라는 가사는 서기전 2세기 이전의 고조선 작품임은 물론, 당시에 서민층에 까지 널리 보급되어 있었던 공후라는 현악기도 고조선의 악기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만 구체적인 근거는 제시하지 못했다. 《『고조선연구』,1963》
한국의 윤내현도 "이러한 리지린의 견해는 매우 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하면서 리지린의 주장에 동조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고조선연구』,1999》
◆공후는 고조선에서 만들어진 우리민족 고유의 현악기다
공후가 중국 악기인가 고조선의 고유한 악기인가 하는 것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문헌을 통한 고증이 필요하다. 『수서』 권15 음악 조항에는 "와공후(臥箜篌), 수공후(豎箜篌)가 고구려의 악기로 소개되어 있다.
『구당서』 권29 음악 조항에는 공후가 백제의 악기에 포함되어 있다. 『북사』 백제전, 『통전』 고구려음악 조항에도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중국에서는 고구려와 백제에 공후라는 현악기가 있다는 사실을 언제부터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악서(樂書)』 권158 사이가(四夷歌) 백제 조항에서 "백제의 악기에 쟁(箏)과 적(笛), 공후 등이 있었는데 당나라 때 이적(李績)이 설인귀를 인솔하고 백제를 멸망시켜 백제의 음악을 얻은 다음 당나라 조정에 바쳤다"라고 말하였다.
즉 당나라 고종 때 백제가 멸망하면서 백제의 악기 공후가 중국으로 흘러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러면 이 공후가 고구려, 백제의 토속적인 고유한 악기냐 아니면 중국의 악기를 받아드린 외래의 악기냐 하는 것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그것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권40 악률(樂律) 조항에 나오는 다음 기록을 살펴보면 답을 얻을 수 있다.
"지금 고려의 음악에는 두 부문이 있는데 좌부는 당악(唐樂)으로 중국 음악이고 우부는 향악(鄕樂)으로 동이의 음악이다. 중국 음악은 악기가 중국제도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다만 향악에는 고(鼓), 판(版), 생(笙), 우(芋), 필률(觱篥), 공후(箜篌), 오현금(五絃琴), 비파(琵琶), 쟁(箏), 적(笛) 등이 있는데 그 모양과 제도가 중국과는 차이가 있다.(今其樂 有兩部 左曰唐樂 中國之音 右曰鄕樂 蓋夷音也 其中國之音 樂器 皆中國之制 惟其鄕樂 有鼓版笙芋 觱篥 箜篌 五絃琴 琵琶 箏笛 而形制差異)"
여기서 당악은 중국 음악, 향악은 고려의 토속적인 음악을 가리킨다. 그런데 송나라 사신이 저술한 『고려도경』에서 공후를 고려의 토속적인 고유한 악기로 분류하고 있다.
중국 송나라 사신이 고려에 와서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쓴 책 『고려도경』에서 공후를 중국의 악기가 아닌 고려의 토속적인 악기로 분류한 것은 공후가 우리민족의 고유한 악기였음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고 여긴다.
그런데 사마천 『사기』 효무본기의 "공후슬(箜篌瑟)"에 대한 응소(應劭)의 주석을 보면 "한무제가 음악인 후조(侯造)에게 명하여 비로소 공후를 제조했다.(武帝令樂人侯調 始造箜篌)"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공후는 한무제 때 최초로 중국에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무제라는 인물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무제는 고조선을 공격했던 인물이다. 공후인이 한무제 이전에는 중국에 없다가 한무제 때 비로소 중국에 등장했다면 한무제 유철이 고조선을 공격할 당시 공후인을 가져다가 중국에서 그것을 모방하여 제조했을 가능성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공후는 단군조선에서 창조되어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다가 조, 한 전쟁을 계기로 중국에 최초로 유입되었고 중국이 이를 모방하여 제조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백수 광부(白首狂夫)의 아내도 공후를 타면서 노래를 부르고 조선 진졸(朝鮮津卒)의 아내 여옥 또한 공후를 타면서 노래를 부른 것을 본다면 고조선에서는 거의 집 집마다 공후를 한 대씩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무제 때 비로소 중국에서 만들어진 공후가 고조선에 전래되었다면 시간적으로 볼 때 고조선의 일부 상류층에서 유행한다는 것은 몰라도 전국적으로 민간에까지 널리 보급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고조선에서는 일반 백성의 아낙네들까지 그것을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를 만큼 공후를 능숙하게 다루었는데 한무제 때 중국에서 수입했다면 결코 이렇게 빨리 대중화되기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후는 중국 악기가 아니라 고조선에서 만들어진 우리민족 고유의 현악기로서 고구려, 백제에 전승되었으며 그것이 중국에 최초로 전해진 시기는 고조선을 침공한 한무제 때였다고 보는 것이 사리에 맞다고 하겠다.
역사학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