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학자 중 누구도 사실을 말하지 않지만, 병자호란은 명백하게 조선이 도발한 전쟁이다. 조선 사신 나덕헌과 이확이 청 태종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식에서 배례를 거부하여 행사를 엉망으로 만들었고, 청 황제의 국서를 숙소에 팽개치고 온 후폭풍이 병자호란이었다. 조선 지도부는 침략을 자초하고도 아무 준비도 없이 도낏자루 썩히다 기습을 당했다. 불과 50여 일 만에 소중화 문명국 조선 국왕이 '오랑캐'로 멸시하던 여진족 추장에게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려(三跪九叩頭禮) 항복했다.
조선 국왕의 항복으로 모든 사안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청군은 철수 과정에서 조선 백성 60만 명을 포로로 끌고 간 것으로 알려졌다. 학자들 연구에 의하면 이 수치는 크게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청의 수도 심양의 인구 규모와 배후지 생산력을 고려할 때, 단기간에 60만 명의 신규 인구를 수용 통제할 수 있는 인프라가 전무했다. 게다가 청군 주력 부대가 포로 60만 명을 한양에서 700km 떨어진 심양까지 이동시키는 것은 병참학적으로 불가능했다. 학자들은 청군의 행군 속도, 포로 탈출율, 심양 포로 시장의 거래 규모를 추적한 결과 조선 포로 규모를 최소 5만, 최대 10만 명으로 추산한다.
청나라는 조선 지배층에 충성을 강요하고, 심리적 굴욕감을 주기 위해 고위 관료나 사대부 집안 부녀자들을 집중적으로 잡아갔다. 이들이 후일 '환향녀' 담론의 중심이 된 존재들이다.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는 왕실과 사대부 가족들의 피난처였다. 청군이 강화도를 함락하고 피난 온 왕실·사대부 가문 여성들을 대거 포로로 잡았다. 청군에 끌려가는 지체 높은 집안 부녀자들의 행렬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치욕스럽게 잡혀가느니 죽음을 택하겠다며 강화도 앞바다에 투신한 부녀자도 상당수에 달했다.
병자호란 당시 청의 인구는 만주족·몽골인·한인 모두 합쳐 200만~300만 내외에 불과했다. 영토에 비해 인구가 너무 적다 보니 가임기의 젊은 양인·천민 여성도 다수 끌고 가 씨받이로 이용했다.
무엇보다 청은 만주의 광활한 영토를 개간하여 식량 생산력을 높이는 것이 급선무였다. 육체노동이 가능한 남성 포로는 청나라 귀족이나 군인에게 분배되어 노예로 부려먹었다. 소현세자가 심양에서 겪은 일상을 관원들이 기록한 『심양일기』에는 조선 남성 포로들이 굶주린 채 채찍질 당하며 일하는 모습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가혹한 노동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치다 붙잡히면 발뒤꿈치나 코를 베는 잔혹한 형벌이 가해졌다. 목숨 걸고 탈출하여 고향으로 돌아와도 그것으로 비극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청나라는 탈출 포로에 대한 환수권을 강력 주장했다. 무능한 조선 조정은 청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탈출해 온 자국민을 잡아다 청에 넘겨주는 추쇄를 자행했다. 다시 끌려가는 포로 중 일부는 압록강 국경 근처에서 집단 자살하는 일마저 벌어졌다.
◆본처 학대 시달리다 자결한 조선 여성
명나라 공략을 앞둔 청은 조선 포로 중 조총병을 우대했다. 이들은 만주팔기 내 솔호 니루의 화력 강화에 투입되었다. 또 대포·화약 등을 만드는 무기 기술자, 축성 기술자 등 특별한 기술을 보유한 장인들은 선별하여 귀화시켰다. 제지 기술자, 인쇄 장인은 서적 출판을 위한 종이 제조에 투입했고, 은(銀) 제련 기술자는 만주 은광 개발에 동원하여 재정 확보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청은 명나라를 무너뜨리는 마지막 결전에 조선 포로를 대거 동원했다. 이들은 성벽 쌓는 공병, 보급품을 운반하는 수송병, 최전방 조총수, 보병으로 활용되었다. 제지 기술자, 은 제련사, 조총 제작 장인은 청나라 황실·고위층에 편입되어 높은 예우 받아가며 여진족을 위해 일했다.
조선은 각 분야의 장인·기술자 유출로 퇴보를 면치 못했고, 청은 조선 기술자를 대거 흡수하여 대제국의 기틀을 닦는 데 성공했다. 조선 장인들은 고국에선 노비·천민으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았다. 실용성을 중시한 청은 조선의 기술자·장인을 극진히 예우하여 그들의 기술이 이역만리 타국에서 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다. 조선과 청나라 중 누가 더 현명했는지는 그 후의 역사가 증명한다.
특별한 기술이 없는 포로들의 운명은 가혹했다. 병자호란 후 청의 수도 심양 성문 밖에는 대규모 포로수용소와 노예시장이 문을 열었다.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대규모 인신매매 시장이 국가 주도로 개설된 것이다. 조선 출정 군인들은 자기가 잡아 온 포로를 노예시장에 내놓고 구매자들과 흥정을 벌였다. 포로는 나이·외모·건강 상태·기술(바느질, 길쌈 등)에 따라 등급이 매겨졌다. 구매자들은 물건 고르듯 치아를 살피거나 몸을 만져보며 상태를 확인했다. 포로 중에서 젊고 용모 뛰어난 여성은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한 여성을 놓고 구매자 여러 명이 나서면 즉석에서 경매가 벌어졌다.
청나라 귀족의 본처들은 조선 여인들이 용모와 바느질·요리 솜씨가 뛰어나 남편의 총애를 받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그들은 첩이 된 조선 여성 얼굴에 끓는 물을 부어 화상을 입히거나, 낙인을 찍어 외모를 망가뜨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심지어 질투에 눈먼 여진족 본처들이 조선 여성의 코나 귀를 베는 일이 심양 거리 곳곳에서 목격될 정도로 흔했다. 본처의 학대에 시달리던 조선 여성들은 죽더라도 고국에서 죽겠다고 작심하고 탈출하거나, 심양성 밖 혼하(渾河)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이런 모습을 목격한 조선 사신들이 피눈물을 흘렸으나 외교적 마찰을 우려해 항의 한 번 못 했다. 소현세자 수행원들은 "성 안팎의 나무마다 목을 맨 조선 여인들이 매달려 있고, 강물에는 시신이 끊이지 않으니 그 원한이 하늘을 찌른다. 주인 처의 매질에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코를 베인 여인이 길가에서 구걸하며 고국의 소식을 묻는 모습은 지옥의 풍경과 다름없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포로 몸값 치솟아
청나라가 조선 포로를 대거 잡아간 이유는 포로는 곧 '돈'이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국제 무역 결제 수단은 은(銀)이었다. 여진족 청은 명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조총·화약·대포 구입과 용병 고용비, 명군 회유를 위한 뇌물용 은이 대량으로 필요했다. 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대거 조선 포로를 잡아간 것이다.
양국은 협상 과정에서 포로 몸값(속환금)을 1인당 은 10~30냥으로 정했다. 이 와중에 조선 양반들 사이에 가족 송환 경쟁이 벌어졌다. 청 입장에선 꽃놀이패를 손에 쥔 셈이 되었다. 부녀자 한 명 몸값으로 은 500~1천 냥, 심지어 1,500냥을 불러도 조선 사대부들은 돈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조선 정부의 연간 은 보유액은 수만 냥에 불과했다. 청이 명나라 공격을 위한 전비(戰費)를 조선 백성의 몸값으로 해결하겠다고 나서면서 조선은 국부(國富)를 탈탈 털렸다. 결국 조선 포로의 몸값이 명청 교체라는 나비 효과를 일으킨 셈이다.
속환 과정에서 발생한 '사회적 위화감'도 심각한 문제였다. 권문세가는 가족을 데려오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지만, 돈 없는 백성은 속수무책이었다. 인조실록에 의하면 속환비는 평민 1년 치 생활비의 수십 배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조선 조정은 포로 송환 협상에 난항을 겪자 각자도생을 선언했다. 국가는 백성 보호 의무를 다하지 못한데다가, 포로 구제를 개인 능력에 맡겼다. 백성들이 사비를 털어 심양까지 가서 몸값 지불하고 구해오든 말든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다. 전란의 고통을 백성의 골수까지 짜내 해결하라고 방치한, 무책임 정치의 끝판왕이었다.
심양 노예시장은 국가가 지켜주지 못한 백성을 가족들이 개인 돈으로 사와야 하는 비극의 현장이었다. 유전생환(有錢生還)이요, 무전포로(無錢捕虜)의 비정한 현실은 조선 사회의 내부 결속력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637년 승정원 사관 한이겸은 끌려간 아내를 구하기 위해 전 재산을 털어 심양으로 향했다. 심양 노예시장에서 아내를 찾아냈으나, 청나라 주인은 몸값으로 준비해 간 은의 몇 배를 요구했다. 간신히 빚을 내 아내를 데려오는 데 성공했으나 더 큰 환란이 기다리고 있었다. 절개 잃은 여성에 대한 문중의 압박과 성리학적 명분론에 시달려 아내와 이혼한 것이다.
한이겸의 아내처럼 돌아온 여성들이 마주한 것은 남편과 시댁의 냉대였다. 주화파 현실론자 최명길은 "국가가 힘이 없어 백성을 지키지 못했는데, 사지로 끌려갔다 돌아온 부녀자들에게 정절을 묻는 것은 가혹한 처사"라고 항변했다. 그는 전란의 책임이 국가에 있음을 인정하고, 피해자 여성들을 포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제기했다.
인조는 이 제안을 수용하여 "홍제천 물에 몸을 씻으면(洗心) 과거의 일을 묻지 말라"라는 어명을 내렸다(인조 16년 3월 11일). 이 조치에 김상헌을 필두로 한 주자성리학 탈레반들이 강력 반발했다. "몸을 더럽힌 부녀자에게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할 수는 없다"라며 어명을 거부한 것이다. 사대부 집안에서는 홍제천 목욕 후에도 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고 별당에 가두거나, 자결을 강요하는 사적 제재가 광범위하게 자행됐다.
전란의 책임을 통감해야 할 수컷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무능을 은폐하기 위해 여성의 정절을 절대 가치로 격상시켰다. 중화(中華)를 계승했다는 소중화 의식이 강해질수록 오랑캐와 접촉한 자들에 대한 혐오는 비이성적으로 강화되었다. 조선은 외적(청나라)에게 입은 상처를 내부의 약자(환향녀·호로자)들을 억압하는 것으로 치유하는 병리적 사회로 퇴행했다. 백성을 지키지 못한 추악한 사대부들이 천신만고 끝에 살아온 여성들을 주자성리학적 명분론으로 타살한 것이다.
갈 곳 잃은 여성들은 도성 밖 성북동·홍제원 근처에 움막을 치고 살았다. 경기도 인근 청룡사·보문사 등 비구니 사찰이 이들의 안식처였다. 여성들은 포로 시절 익힌 바느질·길쌈으로 연명하거나,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이것이 훗날 화냥년의 어원이 된다. 청나라에서 임신하여 돌아온 후 낳은 아이들의 운명은 더 비참했다. 그들은 호로자(胡虜子)라 하여 사회적 최하층민으로 전락했다. 이것이 '후레자식'의 어원이다.
김용삼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