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인생에 단어가 스며드는 순간
황선엽 지음/ 빛의서가 펴냄
최근 미국 미주리 캔자스시티대(UMKC)와 애리조나대 공동 연구팀이 눈에 띄는 연구 결과를 내놨다. 14년간, 한 개인이 하루 동안 직접 말하는 단어의 양이 매년 338개씩 꾸준히 감소했다는 것.
스마트폰과 SNS 등장 이후 말 대신 문자로 대화하는 시대, 간결하게 내용을 전하려면 단어 사용은 제한적이고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구어(口語)에 담긴 맥락과 현장성, 감정과 의도 역시 배제되기 마련이다. 연구팀이 "대화량이 문자메시지나 SNS로 이동했다는 분석이 있지만, 그것이 우리 사회를 온건하게 만드는가는 별개의 문제"라고 말하는 이유다.
이렇듯 점차 증발하고 획일화되며, 깊은 고민 없이 무심코 쓰여지는 '단어'의 힘을 다시금 깨닫게 하는 책이 출간됐다. 황선엽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펴낸 신작 '인생에 단어가 스며드는 순간'이다.
그는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이 변하면서 단어가 어떻게 달라져왔는지, 반대로 우리가 쓰는 단어가 우리의 생각과 시선을 바꿔놓는 얘기도 다룬다. 사소해보이는 단어 하나가 사고를 규정하기도 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기준을 만든다는 것.
어떻게 단어가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을 만든다는 걸까? 지은이는 책 속에서 단어가 세상을 나누는 방식에 대해 얘기하며, 하나의 예를 제시한다. "강낭콩(kidney bean), 완두콩(green pea), 팥(red bean)을 두 부류로 나눠보세요."
이 질문에 한국 사람들과 미국 사람들은 전혀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 한국 사람들은 강낭콩과 완두콩을 한 부류로, 팥을 한 부류로 나누는 반면 미국 사람들은 강낭콩(kidney bean)과 팥(red bean)을 한 부류로, 완두콩(green pea)를 한 부류로 나눴다.
지은이는 같은 사물을 두고도 공유하는 단어끼리 다르게 인식하고 분류하는 이 사례를 통해, 우리가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단어의 세계를 깨닫고 세상을 더 풍부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언어나 단어는 세상을 인식하고 사고하는 데 큰 도움을 주는 유용한 도구가 된다. 세상을 더 세밀하게 인식하고 다채로운 해상도로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라는 게 그의 얘기다.
또한 평범한 일상에서 작용하는 단어의 힘에 대해서도 다룬다. '도련님이라는 단어가 불교 용어에서 왔다', '낭만이라는 단어는 번역의 묘미에서 생겨났다', '졸업식 노래 속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는 진짜 언니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등 단어와 관련한 깊고 흥미로운 얘기들이 이어진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김동인의 단편소설 '감자'에 나오는 감자가 실은 고구마를 뜻하는 말이었다는 사실이나, 음산하고 황량할 때 '을씨년스럽다'고 말하게 된 이유, 몸속 장기와 인간의 심리가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비밀, '병오년, 붉은 말의 해'라는 식으로 연도를 부르는 이유 등 일상에서 단어의 다채로운 용법과 그것을 둘러싼 인간의 생활에 대해서도 다각적인 측면에서 해석하고 바라본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달러($) 기호를 비슷한 형태의 '불(弗)' 자로 표기하던 것을 가져와 '불'이라고 읽게 됐다는 것, 이집트 피라미드의 외형이 '쇠 금(金)' 자를 닮았다고 해 중국에서 번역한 '금자탑'을 빛나는 금으로 만든 탑으로 오해해 찬란한 업적의 상징으로 소비하는 맥락 등 외국에서 들여온, 우리가 흔히 쓰는 단어에 대한 오해와 진실도 짚어준다.
이처럼 이 책은 작은 단어 뒤에 숨어있는 거대한 세계사의 흔적과 반전의 서사를 추적해나가며, 국경과 시공간을 넘나드는 흥미로운 지적 탐험의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매일 사용하는 단어에도 이토록 아름답고 놀라운 세계가 숨어있다니. 무심코 보고 듣고 쓰던 일상 속 단어들마저 달리 보이게 되는 책이다. 328쪽, 2만2천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