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김수용] 반도체 클러스터, 입지보다 기반 조성이 먼저다

입력 2026-07-22 05:00:00
구글 검색 선호 출처로 추가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김수용 논설실장
김수용 논설실장

얼마 전 로이터 통신은 미국 버지니아주 애슈번(Ashburn)의 낯선 풍경을 전했다. '데이터센터 앨리(Data Center Alley)'로 불리는 이곳은 아마존과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메타의 데이터센터가 밀집한 인공지능(AI) 산업의 심장이다. 공사는 순조로워 보였다. 철골은 올라갔고 냉각설비도 설치됐으며, 서버도 곧 들어온다. 그런데 마지막 단계에서 공사가 멈췄다. GPU 부족이나 자금난(資金難) 때문이 아니었다. 초고압 변압기가 없어서다. 로이터에 따르면 미국 전력회사들은 변압기 확보를 위해 몇 년 전부터 생산 물량을 예약하고 있고, 일부 제품은 납기만 160주에 이른다. AI 혁명의 병목은 최첨단 반도체가 아니라 100년 넘게 전력망을 지탱해 온 거대한 철제 변압기였다.

다른 기사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스리마일섬을 세상 앞으로 불러냈다. 1979년 3월 2호기 원전 사고 이후 홀로 가동되던 1호기마저 경제성 부족 탓에 2019년부터 멈춘 상태였다. 폐쇄된 원전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으로 여겼지만 AI 등장 이후 계산법이 바뀌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2024년 AI 데이터센터에 필요한 막대한 전력을 확보하기 위해 원전 운용사와 재가동될 원전의 전력을 장기간 구매하기로 계약했다. 한때 경제성을 이유로 문을 닫았던 원전이 불과 5년 만에 재가동 절차를 밟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의 최근 보고서도 비슷한 역설을 보여준다. 새 AI 모델은 수시로 등장하고 반도체는 매년 성능을 높여 가지만, 송전망(送電網)은 그렇지 않다. 송전선 하나를 새로 깔려면 주민 협의, 환경영향평가, 인허가를 거쳐 길게는 10년 가까운 시간이 걸린다. 지금 미국과 유럽에선 데이터센터보다 전력망 해결이 급선무다. 21세기 기술은 빛의 속도로 달리는데, 전기는 여전히 20세기의 시간으로 움직인다.

홋카이도 치토세에서는 일본 정부가 2나노 첨단 반도체 양산을 목표로 설립한 국가 프로젝트 '라피더스(Rapidus)' 공사가 한창이다. 한때 세계 반도체 강국이던 일본은 최첨단 시스템 반도체 생산의 중심에서 밀려났다. 시장 논리는 냉정했고 수익성이 떨어지는 공장은 문을 닫았다. 최첨단 반도체 공장은 막대한 투자와 긴 회수(回收) 기간, 높은 실패 위험 때문에 민간 기업이 단독으로 뛰어들기 어렵다. 일본 정부가 2조엔이 넘는 보조금을 투입한 이유다. 일본 언론과 정부 자료에 반복해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경제안전보장'이다. 첨단 반도체를 국내에서 생산할 수 있는 능력 자체를 국가 경쟁력으로 보기 시작했다. 단기 수익성보다 국가 전략을 우선한 판단이다.

AI와 반도체, 원전, 송전망, 변압기는 첨단기술을 떠받치는 기반(基盤)이다. 세계 각국이 전력망을 늘리고, 원전을 다시 세우고, 반도체 생산 기반에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는 이유다. 첨단기술도 중요하지만 이를 안정적으로 구현할 기반을 먼저 확보한 나라가 경쟁력을 갖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한국도 AI 육성을 말하기에 앞서 전력과 송전망, 용수, 반도체 공급망 같은 기반을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최근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를 둘러싼 논란도 마찬가지다. 지역 균형발전이든 산업 육성이든 출발점은 입지의 정치적 상징성이 아니라 세계 최고 수준의 전력과 용수, 공급망, 인재를 얼마나 빠르고 안정적으로 갖출 수 있느냐다. AI 시대의 경쟁력은 공장을 어디에 짓느냐보다 그 공장이 제대로 돌아갈 기반을 갖추고 있느냐에서 결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