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백 년'과 '1초'

입력 2026-07-13 09:52:47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임현락 한국화가(경북대 미술학과 교수)

임현락 한국화가(경북대 미술학과 교수)
임현락 한국화가(경북대 미술학과 교수)

대구에 정착한 지 어느새 이십 년이 훌쩍 넘었다. '아침에 파란 실 같던 머리카락이 저녁에 눈처럼 하얗게 됐다'는 이백(李白)의 시구절이 이토록 서늘하게 와닿을 줄 몰랐다. 그런데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이 도시가 여전히 낯선 얼굴로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

경험의 질은 시간의 양을 압도한다. 유년기부터 청년기까지 저장된 기억은 한 인간의 정서적 바탕을 이룬다. 사십이 넘어서야 대구에 닻을 내렸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의 일상이 학교와 집, 작업실이라는 기능적 공간에만 갇혀 있었던 탓이 크다. 그러던 내게 이 도시의 숨어있는 오랜 결들이 찾아와 말을 걸어왔다.

어느 날, 연구실의 대학원생이 "교수님, 제가 우연히 전시하고 싶은 곳을 찾았는데 한번 봐주실래요? 그런데 일반적인 전시 공간은 아니에요." 호기심에 찾아간 곳은 근대 골목에 있는 무영당(茂英堂). 1930년대 이근무(李根茂)에 의해 조선의 민족자본으로 세워진 대구 최초의 백화점이었다. 낡았지만 단정한 외관은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묵묵히 제 자리를 지켜내고 있었다.

층계를 오르는 순간, 나는 공간이 토해내는 생경한 울림에 빠져들고 말았다. 걸음을 받쳐주는 견고한 돌계단과 껍질이 벗겨진 채 군데군데 허옇게 드러난 벽과 천정은 그 자체가 시간의 화석이었다. 그 사이로 투명하게 스며드는 햇살과 켜켜이 배어 있는 시간의 냄새가 나의 영감을 세차게 흔들었다. 문득 원형이 그나마 남아있을 때, 살아있는 이 건축물 위에 나의 호흡을 심고 싶다는 열망이 차올랐다.

백 년의 무영당과 찰나의 붓질이 만나는 지점, 그렇게 '백 년과 1초'라는 전시가 태어났다. '백 년 건축'이라는 과거의 축과 나의 그림 '1초 수묵'이라는 현재의 선이 시공을 초월하여 조우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과거와 현재가 쉼 없이 버무려지는 그 시공간에 머물며 조용히 거닐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대구라는 도시의 시간을 느낄 수 있는 향촌동과 약령시장, 청라언덕과 공구 골목이 사방으로 펼쳐져 있다. 전시장을 나서며 골목길을 조우할 때마다 내 안의 세포들은 새로운 기억을 채우느라 바빠졌다. 길에서 만난 오랜 세월을 지켜온 노포들과 미래의 노포들을 서성이며 음식에 깃든 '시간의 맛'도 탐닉했다. 향촌동 골목에서 마주한 단돈 이천 원짜리 장터국수는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진한 국물에 담긴 연륜과 오랜 수행 같은 풍미는 오감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나눌 수 있는 추억이 있다는 것은 삶의 커다란 위로이고 기쁨이다. 지나온 인연, 지속되는 인연, 새로이 스치는 인연 모두가 눈부시다. 삶은 아득하고 요원하지만, 결국 타인의 마음속에 기억으로 남아 함께 자란다. 이 찰나의 시간여행을 지금 여기에 살아서 누릴 수 있다는 것, 참으로 과분한 호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