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80년, 격동 80년]1974 육영수 여사 피살과 한국 현대사의 회오리

입력 2026-07-17 12: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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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을 향해 쏜 조총련 문세광의 총격 테러
옥천 육씨 집성촌에서 태어나 '향년 48세'
큰 파장, 보안 정국·한일 관계 경색·딸 박근혜 등판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문세광의 총성에 경호원들이 방어태세를 취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연단 밑으로 피신하고 육영수 여사가 쓰러지고 있다.매일신문 DB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문세광의 총성에 경호원들이 방어태세를 취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연단 밑으로 피신하고 육영수 여사가 쓰러지고 있다.매일신문 DB

전 국민의 존경을 받았던 육영수 여사의 생전 사진. 출처=대통령 기록관
전 국민의 존경을 받았던 육영수 여사의 생전 사진. 출처=대통령 기록관

◆광복절 기념식장에 울린 총성

1974년 8월 15일 오전,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각계 인사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광복절 기념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경축사를 낭독하던 순간, 재일교포 2세 문세광이 권총을 꺼내 연단을 향해 여러 발의 총탄을 발사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화를 면했지만, 귀빈석에 앉아 있던 육영수 여사는 총탄에 쓰러졌다. 육 여사는 곧바로 서울대학교병원으로 후송돼 장시간 응급수술을 받았지만, 같은 날 오후 7시 끝내 숨을 거뒀다. 저격당한 육영수 여사의 서거는 단순한 영부인의 사망을 넘어, 박정희 정권의 통치 기반과 남북관계, 한일관계에 큰 파장을 남긴 현대사의 분수령으로 기록되고 있다.

1974년 8월19일 육영수 여사의 국민장 영결식이 열려 운구차가 서울시청 앞을 지나 숭례문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 출처=서울역사 아카이브
1974년 8월19일 육영수 여사의 국민장 영결식이 열려 운구차가 서울시청 앞을 지나 숭례문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 출처=서울역사 아카이브

◆향년 48세, 꽃다운 나이에 운명

육영수 여사는 충북 옥천 육씨 집성촌에서 태어난 24세 손이다. 1925년 11월 29일생, 향년 48세의 나이로 운명이 달리 했기 때문에 그 슬픔이 더했다. 처음에는 육 여사가 가벼운 총상만 입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장에서 상당한 출혈과 함께 쇼크 상태로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다. 육 여사는 안타깝게도 병원에서 몇 시간 만에 사망 판정을 받았다.

공식적인 사망시간은 8월 15일 오후 7시경이다. 총알이 좌뇌의 가장 큰 정맥을 손상시킨 탓에 다시 깨어날 수는 없었다. 박 대통령은 그날 수술 회복실을 찾아가, 20~30분 동안 작별 인사를 했다.

육 여사는 생전에 고아원과 양로원 방문, 여성복지 사업, 음성 나환자촌 지원 등 사회복지 활동으로 국민적 호감을 얻었던 인물이었다. 전 국민은 국모(國母)를 잃은 큰 슬픔에 빠졌다. 단아한 외모에 늘 소외된 곳을 돌보던 영부인이었던 탓에 온 국민이 비통함에 빠졌다. 당시 본지 16일자 1면에는 박정희 대통령 피격 소식을 전했으며, 17일자 1면에는 육영수 여사 사망 뉴스가 타전됐다.

1974년 8월 17일자 본지 1면 톱 기사로 육영수 여사의 서거 소식을 전했다. 매일신문 DB
1974년 8월 17일자 본지 1면 톱 기사로 육영수 여사의 서거 소식을 전했다. 매일신문 DB

갑작스런 사망소식에 청와대와 빈소에는 전국에서 조문객이 몰렸으며, 사상 최초로 1974년 8월 19일 국민장이 거행됐다. 수많은 시민들이 영결식장 주변과 거리에서 슬픔을 함께 했으며,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육 여사 사망 이후 큰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로, 겉으로는 안 그래 보여도 속으로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육 여사에게 의지하던 부분이 많았던 터라 마음이 많이 약해져, 작은 일에도 조심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퍼스트레이디' 박근혜 등장과 영애 정치
어머니의 비극적 서거 직후, 당시 유학중이던 장녀 박근혜가 귀국하면서 22세의 나이에 어머니를 대신해 영부인 역할을 대행하기 시작했다. 외교적 무대와 공식 행사에 대통령의 동반자로서 참석하며 대중의 시선 속에 각인되었고, 이는 수십 년 뒤 그가 정치 지도자로 성장하는 데 있어 뿌리 깊은 정치적 자양분이 되었다.

당시 고교 1학년이었던 장남 박지만은 깊은 방황으로 학교 성적이 하락하며 원래 목표였던 서울대 진학 대신 육군사관학교로 진로를 변경했다.

고 육영수 여사 영결식을 마친 후 박정희 대통령이 국립 묘지로 향하는 영구차를 뒤따르고 있다.
고 육영수 여사 영결식을 마친 후 박정희 대통령이 국립 묘지로 향하는 영구차를 뒤따르고 있다.

◆ 안보 정국·한일 급랭

육 여사의 피살은 한국 현대 정치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으며, 유신 정권의 성격과 한일관계 등 향후 정국 운영 방식에도 많은 파장을 가져왔다.

한일 관계도 급속도로 경색됐다. 합동수사본부는 테러를 가한 문세광이 일본내 조총련계 지원을 받아 위조된 여권을 이용하여 밀입국한 뒤, 일본의 한 파출소에서 탈취한 권총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합동수사본부는 밝혔다. 일본인 공범이 있었다는 뉴스까지 보도되면서, 양국 관계는 급속도로 경색됐다. 한동안 한일 관계는 단교 직전의 파국 위기로 치달았으며, 다나카 총리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이번 사건이 발생한 데 대해 깊은 유감과 애도의 뜻을 전하고 나서야 간신히 수습됐다.

육 여사의 피살 사건은 국내 정치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박정희 정권은 안보 정국을 더욱 강화하고, 야당 및 민주화 운동 세력에도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 박 대통령 뿐 아니라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하고 있는 박근혜와 차녀 박근령, 장남 박지만 등 가족에 대한 경호도 극도로 강화했으며, 경호처의 임무가 막중해졌다. 또, 유신 체제를 더욱 강화하기 위한 긴급조치도 계속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