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80주년 다시 지역과 함께 '반도체 분산으로 도약'
수도권, 자원에 발목 클러스터 추진 위기
대만, 거점 확산…반도체 산업 성공 기반
생산과 연구, 주거 원스톱 설계
구미·대구·포항 산업 인프라 잠재력
반도체 소부장·로봇·배터리 '초혁신벨트'로
세계 최대 반도체 클러스터를 표방한 경기 남부 메가클러스터가 가동 전부터 전력과 용수라는 현실의 벽을 마주하고 있다. 정부는 용인 클러스터 한 곳에서만 15GW에 달하는 전력과 150만t의 용수가 필요하다고 본다. 인재와 협력업체를 좇아 수도권에 몰린 반도체 생산시설이 정작 공장을 돌릴 전기와 물을 확보하지 못하는 역설이다.
반면 대구경북을 비롯한 비수도권은 소재·부품·장비 기업과 산업단지, 에너지 기반을 갖추고도 AI 반도체 호황의 중심에서는 비켜나 있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이런 가운데 정부가 지난달 29일 청와대에서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를 열고, 삼성전자와 SK그룹이 향후 10년간 국내에 총 4천755조원(삼성 2천655조원, SK 2천100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히면서 반도체 지역 분산 전략이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정부는 이어 서남권과 충청권(2일 아산·392조원)에 이어 3일 경남 진주에서 '영남권 첨단산업 발전비전 국민보고회'를 열고 권역별 투자 계획을 확정해 나가고 있다.
정부 구상의 핵심은 호남에 제2 반도체 클러스터, 충청에 HBM 패키징·후공정과 메모리 증산을 결합한 거점, 영남에 피지컬 AI와 소재·부품·장비 혁신 거점을 두는 것이다.
가장 무게가 실린 곳은 호남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새로 통합된 전남광주통합특별시에 메모리 팹을 각 2기씩, 총 4기를 짓는 데 800조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당초 패키징 등 후공정 중심으로 검토되던 계획이 막판에 웨이퍼 가공을 포함하는 전공정 팹까지 확대된 것이다. 정부는 가동에 필요한 6.3GW 전력과 일일 65만t 용수를 책임지고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삼성은 이 투자를 포함해 호남권에 425조원, 충청권에 140조원, 영남권에 60조원을 배분했고, 기존 평택·용인 클러스터에는 2천30조원을 투입한다.
영남권의 윤곽은 3일 진주 보고회에서 드러났다. 삼성·SK·한화·현대차·두산·LG 등 6개 기업이 반도체·AI·우주항공을 중심으로 총 312조원을 투자한다. 한화는 위성·발사체 등 우주항공·방산에 55조원, 현대차는 자율주행 모빌리티와 제조 AI에 42조원을 넣는다. 지난달 발표에서 영남권 몫을 제시하지 않았던 SK도 2GW급 AI데이터센터를 포함해 140조원의 단계적 투자 계획을 내놨다. 정부는 부산 전력반도체 클러스터와 구미 소부장·방산 특화 반도체 테스트베드로 영남을 차세대 반도체·소부장 혁신거점으로 키우고, 구미~포항~대구~창원을 잇는 '첨단로봇 초혁신벨트'와 울산 1GW 메가 데이터센터, 사천 중심의 남해안 우주항공 벨트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발표는 수도권 메가클러스터를 유지하면서 추가 성장축을 비수도권에 두겠다는 신호다. 다만 AI 반도체 수요가 폭증하면서 메모리 생산능력뿐 아니라 HBM, 패키징, 소재·부품·장비의 연결성이 중요해졌고, 입지도 전력·용수·정주여건을 함께 갖춘 곳을 따질 수밖에 없게 됐다.
◆'공장'이 아닌 '도시'를 지은 대만·日
정부의 성장축 확장 전략은 지역에 부족한 산업 기반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지방의 강력한 성장 동력이 될 것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호남과 충청, 영남 각지에 특화 산업을 키운다는 구상인 한편, 기반시설과 인재 양성을 상당 부분 새로 닦아야 한다는 점에서 우려도 나온다.
이에 대만의 과학단지 전략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존 산업 기반과 TSMC를 앞세운 앵커 전략이 맞물리면서 대만 각지의 과학단지가 번성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조성된 신주는 세제 혜택, 인프라, 연구개발 지원을 포괄하는 종합 생태계로 조성됐다. 이곳 기업들은 공업기술연구원(ITRI)과 국립칭화대, 국립교통대 등 주요 대학의 기술 역량을 적극 활용했다. 이는 IC 설계, 웨이퍼 제조, 패키징·테스트를 아우르는 대만의 완결형 반도체 가치사슬 형성을 가능하게 했다.
이후 TSMC는 신주의 부지·전력·용수 한계가 커지자 가오슝·타이난·타이중·자이 등으로 생산·후공정 기능을 확장했다. 단순히 공장을 흩어놓은 게 아니라 토지·전력·용수·폐수처리·행정·산학협력을 한데 묶은 과학단지를 먼저 조성하고, 그 안으로 기업을 끌어들이는 방식이었다. 롄셴밍 대만 중화경제연구원장은 과학단지를 "대학, 연구기관, 스타트업, 협력업체, 글로벌 기술기업이 긴밀하게 협력하는 공간"이자 "원스톱 숍"이라고 표현하며 "신주의 성공 경험을 다른 지역으로 확산했다"고 말했다.
타이중은 공작기계·정밀기계 기반이, 가오슝은 후공정 기업 ASE를 비롯한 중화학·항만·제조 기반이, 타이난은 LCD·광전과 화학 소재 기업이 이미 자리 잡고 있던 곳이다. 여기에 앵커기업 TSMC가 들어서자 협력업체와 대학, 연구기관이 강화되며 '반도체 도시'로 위상이 바뀌었다. 가장 최근 조성된 자이는 쌀·사탕수수 농지였던 곳에 반도체 패키징 인프라가 들어선 사례다. 왕수봉 아주대 교수는 "앵커기업과 과학단지를 중심으로 인재와 공급망이 함께 축적되도록 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 구마모토도 참고할 사례다. TSMC 1공장은 2021년 착공 2년 만에 준공해 2024년 양산을 시작했고, 내후년 가동될 2공장까지 합치면 월 10만장 이상의 12인치 웨이퍼 생산능력을 갖춘다. 일본 정부의 인허가 특례와 보조금, 소니 이미지센서·도쿄일렉트론 등 기존 장비·소재 업체가 닦아둔 기반이 결합한 결과다. 다만 총투자액 약 30조원에 달하는 이곳에서도 교통 정체와 지하수 의존, 주거비 상승, 생활 인프라 부족이 잇따라 제기됐다. 공장 유치보다 운영이 더 어렵다는 뜻이다.
◆대구경북 '생태계 결합' 나서야
이번 발표로 전공정 팹 유치 경쟁은 사실상 호남 중심으로 정리됐다. 지난달 29일 발표 직후 대구상공회의소는 "대구가 빠진 대도약 프로젝트에 깊은 실망과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는 성명을 냈고, 추경호 대구시장 당선인은 "국가균형발전이 아니라 국가균열발전"이라고 비판했다.
지역 업계에서는 SK가 대구 수성알파시티에 검토하던 AI데이터센터 투자에서 손을 뗐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면서 위기감이 커졌다.
3일 진주 보고회는 이 반발에 대한 부분적 응답이었다. 삼성전자와 삼성SDS는 구미에 19조원을 투자해 휴머노이드 로봇 양산 체제와 제조 AX(AI 전환) 기반 AI 팩토리, 제조 로봇과 연계한 AI데이터센터를 구축하기로 했다. 노태문 삼성전자 사장은 영남권 60조원 투자로 일자리 20만 개를 만들겠다고 했다. 정부도 구미 반도체 테스트베드, 로봇 액추에이터 등 핵심부품 R&D 예산 신설, 국내생산세액공제 도입, 영남권 첨단 국가산단 조성과 메가특구 지정을 약속했다. 구윤철 부총리는 "승자독식의 초경쟁 세계질서에서 진짜 승부처는 과포화된 수도권이 아니라 지방"이라고 했다. 대구경북이 처음으로 이름과 금액이 붙은 앵커 투자를 확보한 것이다.
그러나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 3일 발표에서 대구는 첨단로봇 초혁신벨트의 한 축이자 현대차그룹 미래 핵심부품 클러스터(울산·대구·창원) 대상지로 이름을 올렸을 뿐, 구미처럼 금액이 명시된 앵커 투자는 확보하지 못했다. SK의 대구경북권 데이터센터도 입지 '검토' 단계에 머물러 있다. 영남권 312조원 자체가 호남권 팹 투자 800조원과 견주면 규모의 격차가 뚜렷하고, 그마저 사천·창원·부산·울산에 상당 부분 배분됐다. 확정된 것과 검토 중인 것, 기존 사업의 재포장을 냉정히 가려내고 후자를 확정 투자로 끌어올리는 것이 대구경북의 당면 과제다.
방법은 대만 과학단지 사례에 있다. 신주·타이난·가오슝·타이중은 단순히 TSMC 공장이 들어선 곳이 아니라, 대학·연구기관·협력업체·인프라·행정 지원이 결합된 산업 생태계로 설계된 공간이었다. 대구경북도 구미 19조원 투자를 그런 생태계의 앵커로 삼아야 한다. 구미는 SK실트론 등 웨이퍼·소부장 기반 위에 휴머노이드 양산과 반도체 테스트베드를 얹은 제조 거점, 대구는 국가로봇테스트필드와 ICT 기반을 활용한 로봇 실증·제조 지능화 거점, 포항은 포스텍과 방사광가속기를 갖춘 첨단소재·공정 연구개발 거점으로 역할을 나누고, 이를 정부가 제시한 첨단로봇 초혁신벨트의 실질적 중심축으로 묶어내야 한다.
◆대구경북 공동 전담기구 필요
이를 위해 대구경북 공동의 전담기구를 만들어 기업 유치와 인허가, 전력·용수·부지, 인력 양성, 정주 대책을 원스톱으로 다뤄야 한다. 정부가 내놓은 동남권 투자공사, 5극3특 보조금 같은 지원 수단을 대구경북 사업으로 연결하는 것도 이 기구의 몫이다.
정주 전략도 빠질 수 없다. 산업 클러스터는 공장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일본 구마모토 사례가 보여주듯 공장을 빠르게 유치해도 교통 정체, 주거비 상승, 생활 인프라 부족이 뒤따르면 지역 수용성은 흔들린다. 대만의 과학단지는 무료 순환버스와 단지 숙소, 의료시설을 갖추고, 지역에 따라 국제학교와 쇼핑몰까지 확보해 옮겨온 인재의 정착을 핵심 과제로 삼았다. 반드시 배워야 할 대목이다.
반도체 산업의 다음 경쟁력은 더 큰 수도권이 아니라 전국에 연결된 강한 클러스터에서 나온다. 대구경북이 그 한 축으로 남으려면 배제를 한탄할 때가 아니라, 구미 19조원을 마중물 삼아 구미·대구·포항을 묶은 산업 생태계의 실행계획을 제시해야 한다. 어떤 공정과 기업, 연구기관, 재원을 결합할지 스스로 답을 내놓는 지역만이 새 산업 지도의 한 축이 될 수 있다.
이민호 기자 lmh@imae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