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도핫플레이스] '산신이 된 왕' 태백에 남아 있는 단종의 흔적들

입력 2026-07-01 13: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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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보덕사 산신각 및 단종 영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영월 보덕사 산신각 및 단종 영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관객수 1천600만 명을 기록하며 인기몰이를 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조선 단종의 비극적인 삶을 소재로 많은 사람들에게 '단종앓이'를 일으켰다. 지난 2월 영화 개봉 이후 3개월여만인 지난 5월 17일 기준 단종의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에는 29만여 명, 단종의 무덤인 장릉에 22만여 명 등 많은 방문객이 다녀갔다.

민간 전설에는 단종이 태백산의 산신이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전설이 태백에는 어평이라는 지명과 단종비각으로 남아있다. 태백에 남아있는 단종의 흔적을 되짚어본다.

두문동재. 태백시 제공
두문동재. 태백시 제공

◆태백산신이 된 단종

태백시와 태백문화원에서 펴낸 '태백시지명지'(김강산 著), 단종비각 표지판 안내패널 등에 따르면 조선 6대 임금인 단종은 왕위에 오른지 3년만인 1455년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됐다.

이듬해 성삼문 등이 복위를 꽤했지만 사육신은 죽음을 당했고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돼 영월땅으로 유배됐다. 1457년 금성대군이 순흥 땅에서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되자 단종도 그해 10월 24일 사약을 받고 17세의 어린 아이에 일생을 마쳤다.

단종의 죽음이라는 역사적 사실은 민간 전승으로 확장됐다. 태백을 비롯한 인근 지역에는 단종이 태백산 산신이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오고 있다.

단종대왕당. 강원일보 제공
단종대왕당. 강원일보 제공

단종이 숨을 거둔 날 삼척, 영월, 경북 봉화 지방의 사람들이 동시에 단종이 태백산신령이 된 꿈을 꾸었다는 설화에는 억울하게 죽은 어린 왕의 비극적인 운명을 위로하려는 민중의 염원이 담겨 있다.

또 다른 전설도 있다. 전 한성부윤 추익한은 단종이 영월에 유배된 후 태백산의 머루·다래를 따 자주 진상했다. 어느날 추익한은 과일을 진상하기 위해 영월로 가던 도중 탄부곡(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연하리 계사폭포)에서 곤룡포와 익선관으로 정장을 한 채 백마를 타고 오는 단종을 만났다. 추익한이 "어디로 가시나이까"하고 묻자 단종은 "태백산으로 가느니라"하고 백마를 타고 사라졌다고 한다.

영월 보덕사 산신각, 영모전 등에는 백마를 탄 단종의 영정이 있는데 단종 옆에 머루바구니를 들고 있는 추익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전승 속에서 주민들은 단종을 산신으로 모시고 음력 9월 3일 제사를 올려왔다.

태백산 단종비각 내부 비석. 태백산국립공원사무소 제공
태백산 단종비각 내부 비석. 태백산국립공원사무소 제공

◆"여기부터는 내 땅(御坪)이다"

영월 상동에서 태백으로 넘어오는 길목에는 어평마을과 어평재가 있다. 어평마을은 마을 한 가운데 흐르는 하천을 경계로 동쪽은 태백 어평, 서쪽은 영월 어평으로 나뉜다. 태백산으로 가던 단종의 혼령이 이곳에 다다라 "여기서 부터는 내 땅이다"라고 해 '어평'이라는 마을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단종의 혼령이 쉬었다고 하는 태백 어평에는 단종대왕당이라는 성황당이 있어 매년 마을 사람들이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현재 단종대왕당은 어평마을 안 철학관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당우(堂宇) 내부에는 '단종대왕지신위'라고 쓴 위패가 안치 돼 있었다.

◆어평재? 화방재?

어평마을에서 태백산 유일사 매표소 방향으로 이어지는 고개가 어평재다. 단종의 영이 서린 해발 936m의 어평재는 일제강점기 이후 '화방재(花房)'라는 왜곡된 이름으로 불려왔다. 1910년판 조선지지자료와 1915년판 조선약도 등은 이 고개 이름을 어평치(魚坪峙), 고개 아래 마을을 어평리(魚坪里) 등으로 명기해 왔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지나 1961년 발효된 국무원 고시 16호에서 고개 아래 마을은 어평리라고 표기하면서도 고개 이름은 화방재라고 표기했다.

화방재로 불리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조선총독부 초대 공사였던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의 이름을 따 화방재로 불렸을 것으로 보는 의견이 많다.

일본 도쿄대 교수이며 식물학자였던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은 우리나라의 식물 분포도를 조사하면서 연구활동을 지원했던 이름을 야생화 꽃이름에 붙이고 지역의 다수 지명을 일본식으로 바꾼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한국 특산식물인 금강초롱은 화방초(花房草), 평양지모는 조선총독부 초대 총독이었던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의 이름을 따 사내초(寺內草) 등으로 불려왔으며 이시도야 제비꽃 등에도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에따라 일제강점기의 잔재인 화방재라는 명칭 대신 단종과 관련된 역사적인 이름인 어평재를 되찾자는 움직임이 시민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2013년께 야생화 애호가와 향토사학계 등으로부터 "각종 관광안내 지도 등에 어평재가 화방재로 잘못 표기되고 있다"는 의견이 제시됐고 2016년 태백시가 개칭 절차에 나섰다.
이러한 노력으로 현재 민간영역에서는 어평재가 주 명칭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아직도 어평재가 시작되는 태백 어평재휴게소 인근에는 화방재라는 표지판이 걸려있는 상태다. 일제강점기 이후 반세기가 넘게 지났지만 어평재라는 이름이 온전히 제자리를 찾기는 아직도 요원하다.

단종대왕당 내부. 강원일보 제공
단종대왕당 내부. 강원일보 제공

◆탄허 스님과 단종비각

태백산 망경사에서 천제단 방향으로 올라가는 계단 왼편에는 '태백산 단종비각'이 세워져 있다.

현재의 단종비각은 1955년 망경사 박묵암 스님 등이 힘을 모아 건립했다. 한국전쟁 직후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단종을 추모하기 위해 뜻을 모은 결과다. 건물은 목조 삼칸 겹집의 팔작지붕 형식으로 지어졌다.

태백산신이지만 비각의 위치가 태백산 꼭대기가 아닌 것은 태백산 꼭대기에는 천신에 제사를 지내는 천제단이 있기 때문에 그 아래에 두기 위함이라고 한다.

당시 월정사 조실이던 탄허 스님이 '端宗碑閣(단종비각)'이라는 현판 글씨를 쓰고 비각 내부 비석의 비문을 지었다. 탄허 스님은 20세기 한국 불교계를 대표하는 선승이자 학승으로 난해한 한문 경전을 우리말로 풀이해 강설하며 불교 대중화에 힘쓴 인물이다.

비각 내부에는 '朝鮮國太白山端宗大王之碑'(조선국태백산단종대왕지비)라고 쓴 비석이 세워져 있다. 비석 뒤편에는 '太白山端宗大王碑銘 幷序'(태백산단종대왕비명 병서)라는 제목으로 탄허 스님의 비문이 적혀있다.

단종을 태백산의 도산신으로 모시며 그 위력을 찬양하고 비문을 세우게 된 이력 등을 먼저 서술하고 명문을 기록했는데 명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無中忽有(없다가도 있고)
有而忽無(있다가도 사라져)
往來蕭然(오감에 자취 없으니)
神變難思(신비한 변화 헤아릴 길 없어라)
小大大小(작으면서 크고 크면서 작음은)
靈之威力(모두 신령의 위력이라)
東呑北幷(동북으로 드넓어질 우리 강토여)
非朝卽夕(아침 아니면 곧 저녁에 이뤄지리)

오대산 월정사 홈페이지 '탄허스님방산굴법어'에서 '太白山端宗大王碑銘 幷序'라는 제목으로 전체 비문의 내용과 번역을 확인할 수 있다.

영화 왕사남 열풍으로 단종비각은 태백산 천제단에 오르기 전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쉬어가던 공간에서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보는 장소로 재조명 받고 있다.

태백시 관계자는 "최근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단종의 삶을 소재로 하며 다시금 관심을 끌고 있다. 대중문화는 역사적 인물을 새로운 시선으로 조명하고 그 과정에서 관련 유적과 전승 또한 재조명된다. 영월의 유배지뿐 아니라 태백산 단종비각과 같은 장소 역시 그러한 관심의 연장선 위에 있다. 영화가 불러온 관심이 일시적 흥미에 그치지 않고, 단종을 둘러싼 역사와 지역 전승을 함께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고 말했다.

강원일보 전명록 기자 amethy@kw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