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강우 시인·소설가
지체장애아였다. 아이가 뛰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안쓰럽다는 말로는 부족한 심경이었다. 바짝 붙어 아이를 따라가는 아이 엄마의 표정은 흔들림이 없었다. 아이의 걸음이 엇박자를 낼라치면 아이 엄마는 곧바로 주의를 줬다. 아이는 헐떡거리며 소리지르다가 뭐라고 중얼거리다가 간간이 웃으며 뛰었다. 그들은 그런 모습으로 공원 트랙을 몇 바퀴 돌았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한 찰리 채플린의 말은 그 모자(母子)에겐 해당되지 않았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더 비극인 듯 여겨졌다. 장애아를 둔 부모들이 한결같이 '자식보다 하루라도 더 살고 싶다'고 말하는 저의가 이해됐다.
며칠 뒤 아이 엄마 대신 젊은 남자가 아이와 함께 뛰고 있었다. 아이 엄마의 옆자리에 슬쩍 앉아서 물었다. 물리치료사인 모양이죠? 내 물음에 아이 엄마는 머쓱한 표정으로 아니라고 말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학생인데 가끔 도와준다고 했다.
뛰고 온 아이에게 물병을 건넨 여자가 학생에게 고맙다는 인사말과 함께 따라가느라고 힘들었죠? 했다. 보기는 저래도 아이가 힘이 세서 속도가 제법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자 학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문제라고 답했다. 그러니까 방향을 바로잡아 주는 게 힘들다고. 학생의 첨언에 여자와 나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불수의적 양식이나 심신장애가 있는 게 아니라면 선택한 진로는 전적으로 본인 소관이다. 문득 내 젊은 시절이 생각났다. 먹고 사는 일이 급하다는 핑계로 읽기와 쓰기에 소홀했다. 문학에 대한 갈급증을 느끼면서도 엉뚱한 곳을 좇았다. 대충 쓴 원고를 공모전에 보내 놓곤 자위했다. 사 놓고 읽지 않은 책들의 표지는 빛이 바랬고 낙서 수준의 습작품이 허드레 광고지처럼 쌓여갔다. 목표설정은 해와 달처럼 명확했다. 문제는 허약한 의지였다.
과거의 나태에 대한 보상 심리일지도 모른다. 내가 정한 실행 목표의 상한선은 이삼 년마다 책 한 권 내는 것이다. 문득 아이의 상한선이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아이 엄마에게도 아이에게도 물을 순 없었다. 짐작하건대 누구의 도움도 없이 똑바로 걷고 뛰는 것일 터이다. 하한선은 반찬을 흘리지 않고 제대로 먹는 것 정도.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내 입에서 불쑥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아이가 해 낸 일에 상하한선을 맞추는 게 맞지 않나?"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글쓰기 실행 방안에 대한 답도 될 듯싶었다. 아니 글쓰기뿐이랴, 모든 일이 그럴 것이다. 일에 사람을 맞출 게 아니라 사람에 일을 맞출 것. 물론 사람이 최선을 다한다는 전제 하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