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팩션] ③장화홍련전…장윤기 사건과 보완수사권 폐지

입력 2026-08-14 13:16:00
구글 검색 선호 출처로 추가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기록되지 않은 사건

※우리 명작 고전소설을 뒤틀어 지금 현실을 바라보는 팩션(사실을 뜻하는 '팩트'와 허구를 의미하는 '픽션'의 합성어) 콘텐츠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고전 팩션 시리즈] ③장화홍련전-기록되지 않은 사건 표지. AI로 생성한 이미지
[고전 팩션 시리즈] ③장화홍련전-기록되지 않은 사건 표지. AI로 생성한 이미지

▶원작 설명

계모 허씨로부터 학대받던 장화·홍련 자매는 결국 억울한 죽음을 맞고, 이후 원혼이 돼 나타나 새로 부임한 사또에게 사건의 진실을 알린다. 사또는 사건을 재조사하고 계모의 죄를 밝혀 정의를 실현한다. 억울한 죽음과 한을 풀어주는 구조를 지닌 대표적인 원혼설화 계열 고전소설이다. 작가는 미상. 조선 때인 1656년 평안북도 철산 지역에서 실제로 발생한 살인사건이 바탕이 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사건에선 재산 문제가 주목됐다. 자매가 계모보다 집안 재산 상속권 우선 순위를 가진 게 단초였다.

▶장화홍련전은 흔히 귀신 이야기로 분류되지만, 한국 전통 설화의 중요한 계열인 원혼설화의 대표작이다. 원혼설화는 억울하게 죽은 인물이 죽음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이승 세계에 개입해 자신의 억울함을 풀고 진실을 드러내는 구조를 갖는다. 단순한 공포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에서 해결되지 못한 사건이 다른 방식으로 해결되는 서사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원혼이 돼 나타나 진실을 밝히는 이야기는 한국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반복되는 유형이다. 예를 들어 중국 원나라 때 관한경이 쓴 희곡 '두아원' 같은 작품에서는 억울하게 사형을 당한 인물이 죽은 뒤 하늘의 이변을 통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한다. 한국에서도 장화홍련전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아랑설화'처럼 억울하게 죽은 여성이 사또 앞에 나타나 사건을 해결하도록 만드는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공통점이 뭘까?"

교수가 던진 질문에 윤재가 견해를 밝혔다.

"현실에서는 해결되지 않은 사건이 죽음 이후에 해결됩니다."

사건은 이미 발생했고, 그래서 진실 역시 존재하지만, 그것이 공식적으로 처리 및 기록되지 못했을 때 피해자의 원혼이 등장한다. 사실 장화와 홍련의 죽음은 가정 내부에서 발생한 일이니 권력 구조 안에서 마음만 먹으면 없던 일인 것처럼 숨길 수 있었다. 이때 원혼은 단순한 초자연적 존재가 아니라, 기록되지 않은 사실을 외부로 끌어내는 장치가 된다.

"왜 이 사건은 정상적인 방식으로 기록되지 않았을까?"

교수가 의문을 표하자 윤재가 답했다.

"기록할 수 없는 경우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장화와 홍련 자매를 노려보는 계모 허씨. AI로 생성한 이미지
장화와 홍련 자매를 노려보는 계모 허씨. AI로 생성한 이미지

과거 사회에서 특정 사건은 단순 범죄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로 확장될 수 있다. 심지어 국가의 근간 이념을 흔들 수도 있다. 그러니 은폐해야 한다. 아울러 가문, 권력, 재산 같은 게 얽히는 경우 사건의 진실은 기득권에 의해 기록되지 않거나 변형될 여지가 충분히 생긴다.

참고로 작품의 모티브가 된 1656년 철산 자매 살인사건은 사건을 맡았던 철산부사 전동흘의 8대손이 의뢰해 200년이나 지난 뒤인 1865년 '가재사실록'에 실렸다.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장화홍련전의 근간을 활자로 기록하게 된 동기는 후손들이 전동흘을 기리는 것이었지, 자매의 억울함을 널리 호소하는 건 아니었을 것이다.

▶사건을 은폐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사건 자체를 '비현실'로 만드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건에 귀신이 등장하면 어떻게 되지?"

교수가 물었다.

"사건의 신뢰도가 떨어집니다."

윤재가 답했다.

"그거야. 현실성을 떨어뜨리는 것."

"즉, 귀신은 은폐 장치군요."

장화와 홍련의 원혼으로부터 사건의 실체를 듣는 사또. AI로 생성한 이미지
장화와 홍련의 원혼으로부터 사건의 실체를 듣는 사또. AI로 생성한 이미지
장화와 홍련의 죽음을 다시 조사하는 사또와 관원들. AI로 생성한 이미지
장화와 홍련의 죽음을 다시 조사하는 사또와 관원들. AI로 생성한 이미지

귀신의 증언은 결정적이지만, 동시에 법적 증거로는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이 모순이 바로 장화홍련전의 핵심이다. 진실은 드러나지만, 그 진실은 현실의 기록으로 남지 못한다. 대신 이야기로만 존재하게 되고, 결국 판결문이 아닌 소설로 적힌다.

따라서 장화홍련전은 공포 이야기가 아니라, 당대 법과 기록의 한계를 드러내는 텍스트다. 귀신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기록되지 못한 사실이 남는 방식이다.

그러니 장화홍련전에서 새로 부임해 장화와 홍련의 원혼으로부터 사건의 실체를 인지한 사또는 단순한 판관이 아니다. 보통의 수사나 재판이었다면 '증거불충분' 같은 판단이 가장 먼저 나타나 진행을 가로막았을 테지만, 사또는 법의 실패를 보완하는 역할을 뚝심 있게 수행한다.

"그렇다면 이건 복수 이야기입니까?"

다른 학생의 질문에, 교수는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원혼의)복수라기보다는 (사건의)복원."

장화와 홍련, 그리고 계모가 현대 법정에 선다면?. AI로 생성한 이미지
장화와 홍련, 그리고 계모가 현대 법정에 선다면?. AI로 생성한 이미지

▶그날 밤, 교수는 문득 과거 수업 중 사례로 다룬 한 판결문이 떠올랐다. 내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판결문엔 이름이 없었다. 누가 죽었는지, 누가 살해했는지, 누구의 사건인지. 아무 정보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 공백만이 남아 있었다. 공백이, 이야기보다 더 또렷하게 기억에 남은 것이다.

사건의 실체는 사라질 수 있지만 '사건이 사라졌다'는 서술은 반대로 좀체 없어지지 않고 짙게 남는다. '그것이 알고싶다' 류 프로그램에서 '미제사건'을 파헤치며 용의자를 추적하면 국민적 관심이 폭발하는 이유일 터다. 장화홍련전이라는 기록을 계기로 시작된 민중들의 관습이자 어떤 본능은 아닐런지.

※'④춘향전-선택은 사라지고 이야기만 남는다'에서 계속.

책
책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 표지
책
책 '플라워스 인 디 애틱' 표지
영화
영화 '장화, 홍련' 포스터. 네이버 영화

▶함께 보면 좋을 작품=애크로이드 살인 사건/플라워스 인 디 애틱/장화, 홍련

◇책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1926, 애거사 크리스티)=한 집안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추적하는 추리소설이다. 가까운 관계 속에서 숨겨진 진실이 뒤늦게 드러난다는 점이 장화홍련전과 닮았다.

◇책 '플라워스 인 디 애틱'(다락방의 꽃들, 1979, V.C. 앤드루스)=가족에 의해 고립된 아이들의 비극을 그린 소설이다. 폐쇄된 가정과 억압 구조가 장화홍련의 세계와 맞닿는다.

◇영화 '장화, 홍련'(2003, 김지운 감독, 임수정·문근영 출연)=가족 내부의 비극과 억울한 죽음을 다룬 공포 영화다. 원혼의 존재, 환각, 망상 등의 요소가 원작과 직·간접적으로 이어진다.

교수와 윤재, 그리고…. AI로 생성한 이미지
교수와 윤재, 그리고…. AI로 생성한 이미지
검찰과 경찰이 지난 7월 21일 장윤기 사건 부실 수사와 증거인멸 의혹 등을 규명하기 위해 경찰청 국가수사본부를 동시에 압수수색 했다. 이날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에서 검찰 관계자들이 압수물이 담긴 상자를 들고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검찰과 경찰이 지난 7월 21일 장윤기 사건 부실 수사와 증거인멸 의혹 등을 규명하기 위해 경찰청 국가수사본부를 동시에 압수수색 했다. 이날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에서 검찰 관계자들이 압수물이 담긴 상자를 들고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연결고리 시사 이슈=장윤기 사건과 보완수사권 폐지

장화홍련전과 연결해 볼 수 있는 시사 이슈는 장윤기 사건 부실수사 논란과 검찰 보완수사권 폐지다. 장화와 홍련의 억울한 죽음은 곧바로 밝혀지지 않는다. 새로 부임한 사또가 사건을 다시 들여다본 뒤에야 자매의 죽음은 단순한 비극이 아닌 은폐된 범죄였음이 드러난다.

장윤기 사건이 이 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경찰 수사 단계에서 확보했어야 할 증거가 사라지거나 누락됐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현직 경찰 간부인 피의자 부친과 수사팀의 유착 의혹이 불거졌다.

이때 장화홍련전 사또의 재조사 같은 효과를 낸 게 검찰의 보완수사권이었다. 검찰 보완수사 과정에서 사라진 증거, 누락된 감식 자료, 확보되지 않은 핵심 단서들이 드러난 것.

그런데 이 장점이 한창 부각되던 지난 7월 31일 국회는 검사의 직접 보완수사권을 완전히 폐지하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야당은 물론 여당 일각에서도 제기되던 예외적 허용 등의 절충·보완 여지마저 없앤 결과다.

검찰개혁이라는 큰 방향은 분명 오래된 과제였지만, 장윤기 사건은 다른 질문을 남겼다. 수사기관이 놓치거나 덮은 사건을 누가 다시 볼 것인가. 첫 수사가 부실했을 때, 피해자와 유족은 어디에 다시 문을 두드릴 수 있는가.

물론 장윤기 사건 하나로 경찰 수사 전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보완수사권을 둘러싼 논쟁 역시 검찰 권한을 유지할 것인지, 경찰 책임수사를 강화할 것인지가 맞서는 복잡한 제도 논쟁이다. 그러나 서민 피해자와 유족의 처지를 강조할 필요가 있다. 처음 수사가 잘못됐을 때, 그 잘못을 바로잡을 다음 단계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느냐다.

장화홍련전은 원혼이 직접 나타나 진실을 말하는 이야기다. 현실의 피해자들이 오히려 부러워할 만한 판타지 요소다. 특히 장윤기 사건처럼 피해자가 사망한 경우라면 그 유족은 더더욱.

그래서 형사사법 제도에는 누군가의 죽음과 억울함을 다시 확인하는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다. 장윤기 사건과 보완수사권 폐지 논란은 장화홍련전이 던진 오래된 질문을 오늘의 제도 앞에 다시 세운다.

장윤기. 연합뉴스
장윤기.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