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령 바이올리니스트
얼마 전, 좋아하는 집시재즈팀 '라 쁘띠 프랑스 콸텟'의 공연을 보러 오랜만에 기차를 탔다. 클래식 연주자인 내가 정말 쉬고 싶을 때 자주 찾는 음악은 의외로 집시재즈나 보사노바다. 하루 종일 바흐와 슈만을 붙들고 사는 사람이 정작 마음이 지칠 때는 전혀 다른 음악을 듣고 있으니 우스운 일이다.
공연장은 생각보다 작고 가까웠다. 연주자들의 손끝과 숨소리, 서로 주고받는 눈빛까지 보였다. 기타와 콘트라베이스가 만들어내는 반복적인 리듬 위로 바이올린이 자유롭게 떠다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반복은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같은 패턴 안에서도 연주자들은 자유와 영감에 휩싸인 듯 반응했고, 그 흔들림들이 음악을 살아 있게 만들었다.
듣는 내내 자꾸 웃음이 났다. 어느 순간부터는 음악을 듣고 있는 건지, 그 안에서 함께 흔들리고 있는 건지조차 잘 구분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몸이 박자를 타고 있었고, 자리에서 일어나 춤추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클래식 공연장에서 느끼는 몰입과는 또 다른 종류의 생명력이었다.
공연이 끝난 뒤 묘한 혼란이 남았다. 나는 왜 이런 음악 앞에서 이렇게 자유로워지는 걸까. 어쩌면 나는 클래식보다 집시재즈를 더 좋아하는 걸까.
하지만 천천히 깨닫게 됐다. 내가 진짜 부러워한 것은 장르 자체가 아니었다는 것을. 내가 끌렸던 건 그 음악 안에 살아 있던 어떤 상태였다. 매 순간 새롭게 반응하는 호흡, 악보 밖으로 흘러넘치는 인간의 숨결, 완벽하게 고정되지 않은 흐름 같은 것들 말이다.
생각해보면 클래식 역시 원래는 살아 있는 음악이었다. 고전 시대의 연주자들은 즉흥연주를 했고, 악보는 절대적인 결과물이 아니라 음악이 흘러가기 위한 하나의 틀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클래식은 점점 더 정확성과 완성도를 향해 나아갔다. 덕분에 우리는 수백 년 전 인간의 감정과 사유를 오늘까지 만날 수 있게 됐지만, 그 과정 속에서 음악의 살아 있는 떨림은 조금씩 줄어든 것도 사실이다.
철학자 베르그송은 삶을 고정된 형태가 아닌 끊임없이 생성되는 흐름으로 바라봤다. 그의 말처럼 음악 역시 악보 위에 멈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주되는 순간마다 조금씩 다른 숨결로 다시 살아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집시재즈의 거장 스테판 그라펠리의 '러버 컴 백 투 미(Lover Come Back To Me)'를 다시 들었다. 자유롭게 흔들리는 바이올린 선율을 따라가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갈망했던 것은 새로운 장르가 아니라, 음악 안에 살아 있는 자유였는지도 모르겠다고. 완벽하게 고정된 음악보다 지금 이 순간만 존재하는 숨결. 음악의 본질은 어쩌면 그런 살아 있는 흐름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