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강우 시인·소설가
공원 산책로를 돌 때마다 1인 관객이 된 기분이다. 산책로 따라 벤치가 놓여 있다 보니 본의 아니게 벤치의 풍경을 보게 되는 것이다.
언제나처럼 공원을 돌다가 그 벤치의 젊은 남녀를 보았다. 한눈에 봐도 연인이었다. 그런데 서너 바퀴를 돌 때까지도 둘의 자세가 그대로였다. 앞만 보고 있는 모습이 모아이 석상을 연상케 했다. 심각한 상황이라는 걸 직감했다. 여덟 바퀴째 돌 무렵 여자가 울고 있었다. 곁에 있던 모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여자가 쥐고 있는 종이에 눈길이 갔다. 봉투가 있는 걸로 봐서 편지 같았다. 눈길을 의식해서인지 약간 고개를 숙였을 뿐 여자의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열 바퀴를 돌 때까지도 여자는 편지를 쥔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물론 편지가 아닐 수도 있었다. 열 번째 받은 불합격 통지서일 수도, 절망적인 진료 소견서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편지와 함께 손에 쥔 건 연보라색 봉투였다. 순간,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물에 떠내려가는 편지를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 죽은 병사 그래버. 레마르크의 소설 '사랑할 때와 죽을 때'를 각색한 영화였다.
부대가 후퇴를 하던 와중에 독일군 병사 그래버는 창고에 가둔 러시아 민간인들을 처치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임무 수행에 나선 동료에게 총을 쏘고 민간인들을 풀어준다. 연인에게서 온 편지를 읽으며 걷는 그를 누군가 부른다. 뒤를 돌아본 그를 민간인 하나가 저격한다. 쓰러진 그래버는 물에서 맴돌고 있는 편지를 주우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눈을 감는다.
영화는 눈앞을 가리는 풀의 묘사로 끝을 맺는 소설에 비해 훨씬 극적이었다. 이십대에 본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편지만 봐도 죽음이란 단어가 떠오를 정도였다. 나로 하여금 레마르크의 작품을 섭렵하게끔 한 그 영화의 편지는 언젠가부터 죽음이 아니라 진실의 징표이다. 군복무 시절 내가 받았던 연애편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때 본 영화 속의 편지도, 내가 받은 편지도 이젠 아련한 그리움이다. 내가 오늘 살아서 갖는 그리움은 과거가 보낸 안부인사에 대한 답장일지도 모른다.
그게 내 예상대로 이별을 통보하는 편지라면 그녀에게 말하고 싶다. 만남을 약속하는 편지를 받을 날도 있다고. 아니, 차라리 당신이 쓰는 게 낫겠다고. 당신의 마음을 느꺼이 읽은 누군가 그 편지에 답장하고 또 당신이 그 답장에 답장을 하는 시간이 창창히 남아 있지 않느냐고. 그래도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겠다면 이런 말은 또 어떤가.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어떤 사람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이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