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80년,격동 80년]한국 최초의 추기경 탄생…한국 가톨릭 200년 만의 경사

입력 2026-06-12 12: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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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옹기장수의 아들, 김수환 대주교…세계 최연소 추기경에 오르다

1969년 4월 28일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가 직접 김수환 대주교에게 추기경 반지를 수여하며 한국인 최초의 추기경 탄생을 전 세계에 알렸다. 당시 김수환 추기경은 전 세계 136명의 추기경 중 최연소(47세)였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공
1969년 4월 28일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가 직접 김수환 대주교에게 추기경 반지를 수여하며 한국인 최초의 추기경 탄생을 전 세계에 알렸다. 당시 김수환 추기경은 전 세계 136명의 추기경 중 최연소(47세)였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공

1969년 4월 28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 김수환 추기경 서임식. 한국 천주교 200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47세, 전 세계 최연소 추기경이었다. 박해와 순교의 피 위에 세워진 한국 교회가 마침내 세계 가톨릭의 중심에 섰다.

◆한국 가톨릭 2세기 만의 경사

1969년 3월 28일, 바티칸. 교황 바오로 6세가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대주교를 추기경에 임명했다. 한국 가톨릭 2세기 만의 첫 추기경 탄생이었다. 아시아인으로는 다섯 번째였다.

발표 당일 김 추기경은 일본에 머물고 있었다. 이튿날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공항에는 환호 인파가 가득했다. 일제강점과 분단, 6·25전쟁의 폐허를 딛고 이제 막 일어서던 나라에 날아든 소식이었다. 종교계를 넘어 온 나라가 들썩였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이날 김 추기경을 포함해 35명을 동시에 서임했다. 가톨릭 역사상 최대 규모였다. 제3세계 추기경 수를 18명에서 29명으로 대폭 늘린 것은 가톨릭의 세계화 의지를 천명한 것이었다. 한국 교회에는 겹경사였다. 전년도 병인박해(丙寅迫害,1866년) 순교자 24명을 포함한 103위 복자(福者) 탄생에 이어, 첫 추기경까지 배출했다.

1969년 3월 29일 일본에서 추기경 임명 소식을 듣고 김포공항으로 귀국한 김수환 대주교가 축하 꽃다발을 받고 있다. 가톨릭신문 제공
1969년 3월 29일 일본에서 추기경 임명 소식을 듣고 김포공항으로 귀국한 김수환 대주교가 축하 꽃다발을 받고 있다. 가톨릭신문 제공

◆ 낮은 곳을 향한 평생의 발걸음

1922년 대구. 김수환은 가난한 옹기장수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순교자의 피가 흐르는 집안이었다. 어머니로부터 베푸는 사랑을, 일본 상지대학(上智大學) 유학 시절 스승 게페르트(Geppert) 신부로부터 사회적 약자를 향한 더 큰 사랑을 배웠다. 그 두 가지가 그의 평생을 이끈 뿌리였다.

1951년 사제 서품. 1956년 독일 뮌스터(Münster) 대학에서 신학과 사회학을 전공했다. 이 시기 접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는 그의 사제관을 결정적으로 바꿨다. 세상을 향해 문을 열고 시대 변화에 응답하는 교회의 쇄신 정신, 그것이 훗날 추기경으로서 그가 걸어갈 길의 나침반이 됐다.

교회 안팎에서 맡은 소임도 막중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을 두 차례 역임했다. 1970년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 위원장으로 선출됐고, 1967년 이후 한국 대표로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에 여섯 차례 참석했다. 1975년 6월부터는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하며 분단된 땅의 교회를 함께 품었다. 1998년 5월 29일,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직을 내려놓았다. 서울대교구장 재임 30년, 목자의 길을 걸은 지 47년 만이었다.

1969년 5월,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로마 일정을 마치고 귀국한 김수환 추기경은 서울대교구 신자들과 함께 장엄한 축하 감사 미사를 봉헌했다. 이 자리에는 교계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평신도와 국민들이 참석해 국가적인 경사를 함께 기뻐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공
1969년 5월,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로마 일정을 마치고 귀국한 김수환 추기경은 서울대교구 신자들과 함께 장엄한 축하 감사 미사를 봉헌했다. 이 자리에는 교계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평신도와 국민들이 참석해 국가적인 경사를 함께 기뻐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공

◆한국 가톨릭의 급성장

그가 서울대교구장으로 활동한 30년, 한국 가톨릭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취임 당시인 1968년 본당 48개·신자 14만 명이었던 서울대교구는 1998년 본당 203개·신자 125만 명으로 불어났다. 신자 수만 9배 증가였다.

종교 전문가들은 이 시기 한국 가톨릭 성장의 동력을 네 가지로 분석한다. 조직력·청렴도·결속력·개방성이다. ▷군사정권 시절 사회적 문제에 정면 대응한 조직력 ▷교황청과 교구에 귀속된 인사·재산권으로 부패 여지가 적은 청렴도 ▷관혼상제에서 발휘된 헌신적 결속력 ▷다른 종교를 향한 열린 개방성 등 이 네 가지가 맞물렸다. 가장 권위적으로 보이던 종교가 가장 평등하고 개방적인 종교로 자리매김했다.

1969년 3월 30일자 매일신문 1면에 한국 가톨릭 200년 역사상 처음으로 김수환 대주교가 추기경에 임명됐다는 소식이 실렸다. 매일신문DB
1969년 3월 30일자 매일신문 1면에 한국 가톨릭 200년 역사상 처음으로 김수환 대주교가 추기경에 임명됐다는 소식이 실렸다. 매일신문DB

김 추기경의 이름이 역사에 깊이 새겨진 것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이었다. 민주화 투쟁에 나섰던 학생들이 명동성당으로 몸을 피했다. 공권력 투입이 예상되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는 경찰의 강제 진입을 막기 위해 "나를 밟고, 그 뒤에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라"고 선언하며 시민과 학생을 지켜낸 일화는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상징적인 순간으로 남아있다.

매년 크리스마스, 그가 찾은 곳은 화려한 성당이 아니었다. 빈민촌, 외국인 노동자 숙소, 버려진 아이들이 있는 좁고 누추한 공간이었다. "진정한 사랑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베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 속에서 그들과 함께 하는 삶이다" 그 말 그대로를 살았다.

2009년 2월 16일, 향년 87세로 선종(善終)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각막을 기증했다. 눈을 감으면서도 세상에 빛을 남겼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짧았다.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가난한 옹기장수의 아들로 태어나 세계 최연소 추기경에 오른 사람. 평생 낮은 곳을 향해 걸어간 사람. '바보 김수환'이 남긴 유산은 지금도 이 나라 안에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