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 경매" 안내문만 덩그러니…위기의 대구 산단 현주소
중동전쟁에 원자재값 급등…한계 몰린 기업들
지난 8일 오후 찾은 대구 서구 염색산업단지. 한 공장 출입문 앞에는 '공장 경매'라고 적힌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올해 1월 부도가 난 회사의 공장이었다. 불이 꺼진 공장 안은 인기척도 없이 적막했다. 낡은 간판만이 이곳이 한때 공장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약 500m 떨어진 또 다른 공장도 사정은 비슷했다. 굳게 잠긴 철문 안쪽으로는 먼지가 내려앉은 기계와 뜯기지 않은 우편물, 비닐 자재 더미만 남아 있었다. 이 공장은 경기 침체와 수주 감소를 버티지 못한 채 지난해 9월 문을 닫았다.
대구 산업의 심장 역할을 해온 산업단지 곳곳에서 공장 불이 꺼지고 있다. 경기 침체와 수주 감소 속에 휴·폐업이 이어지는 가운데, 최근 중동전쟁 여파로 원자재 가격까지 오르면서 기업들의 부담이 한층 커졌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밤새 불 켰었는데"…한계 몰린 산단 기업들
동남권 최대 산업단지라 불리는 달서구 성서산업단지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같은 날 찾은 성서산단의 한 제약회사 건물은 이미 1년 전 문을 닫은 상태였다. 한때 직원 80여명이 근무했던 4층 건물에는 관리자만 남아 건물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회사가 문을 닫아도 건물 관리는 해야 해서 사장님이 계속 고용한 상태"라며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직원들로 북적이고 활기찬 분위기였다. 씁쓸한 기분"이라고 말했다.
현장에서는 최근 중동전쟁 여파가 체감된다는 반응이 많았다. 국제유가 상승으로 석유·나프타 가격이 뛰면서 원재료 부담이 급격히 커졌다는 것이다.
염색산단 한 업체 대표는 "섬유 산업에서 석유는 핵심 원재료나 다름없다"며 "원단 생산에 들어가는 자재값이 줄줄이 오르면서 거래처에 제품 단가를 15~20% 인상하겠다는 공문을 보냈는데, 이후 주문량 자체가 크게 줄었다"고 토로했다.
근로자들의 불안감도 커지고 있다. 공장 가동 축소와 수주 감소가 이어지면서 현장에서는 "언제 문 닫을지 모른다"는 말까지 나온다.
염색산단 입주업체 한 직원은 "염색 공장은 스팀 열 사용이 필수인데 스팀 이용료와 자재값이 계속 오르고 있다"며 "결국 회사가 버티지 못하면 인건비부터 줄이게 되니 직원들도 불안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대구 북구 제3산업단지 분위기도 무거웠다. 용접·도장·철강·부품업체들이 밀집한 골목은 문은 열려 있었지만 작업 소리 대신 정적이 감돌았다. 오후 4시가 되자 주변 식당들도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3공단에서 용접업체를 운영하는 백종구(71) 씨는 "예전에는 연휴 때도 쉬지 못할 정도로 바빴는데 작년부터 일감이 확 줄었다"며 "요즘은 출근하자마자 퇴근 준비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했다. 이어 "직원이 많은 업체들은 이미 무너진 곳도 많다"며 "예전에는 자식들이 가업을 잇겠다는 경우도 있었는데 지금은 월급도 제대로 못 주니 다 떠난다"고 말했다.
형제와 함께 모터 수리업체를 운영하는 조모(81) 씨도 "코로나19 때보다 지금이 더 어렵다"며 "원자재값과 운송비는 계속 오르는데 공장 가동 자체가 줄다 보니 일감이 안 나온다"고 말했다.
◆가동률 줄고 폐업 늘고…"상승 원자재 값, 납품 단가 미반영"
산업단지 침체는 수치로도 확인된다. 염색산단 열병합발전소의 지난해 증기 판매량은 130만4천t으로 전년보다 9% 감소했다. 전기 판매량도 같은 기간 7.9% 줄었다. 증기와 전기는 공장 가동에 필수적인 만큼 업황을 보여주는 대표 지표로 꼽힌다.
3공단 입주기업 현황조사에서도 지난해 입점 업체 수는 2천529곳으로 전년보다 34곳 감소했다. 평균 공장 가동률 역시 73.8%에서 70.06%로 떨어졌다. 해당 보고서에는 경기 침체에 따른 휴·폐업과 영업중단 업체 증가 내용도 담겼다.
성서산단의 경우는 지난해 기준 26개 업체가 폐업했고 1개 업체가 휴업을 신고했다. 공장 매각 건수도 지난해 78건, 올해는 4월 기준 40건에 달했다. 특히 최근 중동전쟁 영향 관련 실태조사에서는 응답 기업의 약 79%가 경영 악화를 체감한다고 답했다. 업종별로는 기계업종이 45.1%로 가장 많았고, 섬유·의복업종 16.8%, 석유·화학업종 10.6% 순이었다.
산단 현장에서는 단순한 경기 침체를 넘어 산업 생태계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 공단 관계자는 "예전에는 공장 기계 돌아가는 소리로 밤늦게까지 시끄러웠는데 지금은 조용한 곳이 많다"며 "기업들이 버티는 단계가 아니라 생존을 걱정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원자재값과 전기료, 인건비 상승으로 오른 비용을 중소 협력업체들이 고스란히 떠안은 채 견디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원청의 '단가 후려치기'로 원가 상승분이 납품 단가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기 때문이다.
논공산단의 한 자동차 부품업체 관계자는 "전기료·인건비·원자재 가격은 계속 오르는데 2·3차 협력업체들은 납품 단가를 제대로 반영 받지 못하고 있다"라며 "완성차 업체들은 원가 상승분 일부를 1차 협력사에 보전해주지만 아래 단계 업체들까지는 반영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이어 "단가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하면 거래가 끊길 수 있다는 인식이 강해 문제 제기 자체가 쉽지 않다"며 "3·4차 협력업체로 갈수록 대금 결제도 수개월씩 밀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덧붙였다.
◆"한계 기업 직접 지원 필요…금융 부담 줄여야"
지역 경제 전문가들은 산업단지 불황이 개별 기업 차원을 넘어 구조적인 문제로 번진 만큼 종합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경쟁력이 있는 업체를 중심으로 산업 재편과 규모화 전략을 유도해 산업 생태계 자체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승훈 대구대 경제금융통상학과 교수는 "이미 폐업한 업체의 장비나 인력을 인수하려는 기업이 있다면 금융 지원 등을 통해 상대적으로 여력이 있는 기업들이 구조조정의 주체로 나설 수 있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며 "이를 통해 규모의 경제를 확보하는 방식의 지원도 검토해볼 만하다"고 말했다.
이어 "영세 업체들에 대한 맞춤형 컨설팅도 필요하다. 최근 나프타 가격 상승으로 원재료 수급 부담이 커진 상황에서 규모가 작은 업체일수록 타격이 더 클 수밖에 없다"며 "공급망 다변화를 지원하는 컨설팅과 함께, 이미 시행 중인 정부 지원 제도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지자체 차원의 안내와 지원도 강화돼야 한다"고 했다.
경기 침체 장기화·국제 정세 불안·물가 상승 등으로 한계에 몰린 기업들의 금융 부담을 덜어줄 수 있는 직접 지원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강기천 영남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는 "산단 내 제조업체들은 이미 장기 불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중동전쟁과 물가 상승 같은 대외 변수까지 겹치면서 한계 상황에 내몰린 것으로 보인다"며 "기존 수준을 넘어선 추가 지원책이 필요하다. 임대료 지원이나 대출 이자 유예 같은 현실적인 대책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