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제맥주를 좋아한 이가 있었다. 수제맥주가 대중화되지 않았던 시절, 새로운 술을 맛보기 위해 직장에 반차를 내고 서울을 오갈 정도로 좋았다. 문득 맥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궁금했다. 교육기관의 정규과정에 참여하고 괜찮은 원데이클래스를 찾아다니며 맥주를 공부했다. 대구에서 처음으로 수제맥주 전문점도 열였다.
세월이 흘렀고 누군가를 가르칠 정도로 경험과 기술이 쌓였다. 자신의 공방에서 맥주 제조 방법을 가르치는 게 직업이 됐다. 대학 평생교육원과 자치단체 농업기술센터로부터 강의 요청이 들어올 정도로 명성이 쌓였다.
5년 전쯤엔 전통주가 눈에 들어왔다. 대구에서 전통주 교육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6개월 꼬박 서울·경기도를 오가며 전통주 빚는 방법을 배웠다. 박운석(64) 한국발효술교육연구원 원장 이야기다.
대구 남구 대명동에 있는 한국발효술교육연구원은 정부 지정 전통주 교육훈련기관이다. 박 원장은 이곳에서 수제맥주 교육과 함께 전통주 제조 교육을 한다. 부산·울산·경남 등 경상권은 물론, 이젠 충청권에서도 교육생이 찾아올 정도가 됐다.
그는 지난달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2026 대한민국가양주대전 궁중술빚기대회'에서 약청주 부문 은상을 받았다. 최근엔 '차근차근 전통주'란 책도 냈다. 지난 4일 한국발효술교육연구원에서 박 원장을 만났다.
-'차근차근 전통주'는 어떤 책인가.
▶직접 술을 빚어 마시고 싶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던 사람들을 위해 집에 있는 주방도구를 활용해 술을 빚는 방법을 알려주려고 노력한 책이다. 직장인들이 저희 같은 교육기관에 와서 시간을 투자하고 비용을 지불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흔히 전통주를 빚는 것은 쉽다고 이야기한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 할머니가 막걸리를 빚는 것을 봐와서다. 맞는 말이기도 하다. 쉽게 빚어도, 대충 빚어도 술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맛있는 술을 빚기 위해선 매우 정교한 작업이 필요하다. 과학적 이론을 알아야 하고 이를 술 빚기에 접목시켜야 하기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다. 이런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도록 그간의 노하우를 오롯이 담았다. 그런 과정을 통해 독자들이 전통주의 매력을 조금씩 알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수제맥주를 연구하고 교육하다가 전통주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계기는 단순하다. 결정적인 건 제 나이였다. 수제맥주 전문점을 시작할 당시에도 업계 종사자 대다수는 젊은 층이었다. 제가 나이가 있다 보니 맥주 교육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자연스레 하게 됐다. 그 때가 전통주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씩 나오던 때였기에, 전통주를 하게 된다면 나이가 들어도 한복을 입고 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방향 전환을 한 게 지금에 이르렀다.
발효 과정을 거쳐서 술이 되는 원리 자체가 비슷하기에 자신감도 있었다. 2021년 경기도 성남에서 3개월, 2022년 서울에서 3개월을 배웠는데 결석 한 번 안 했다. 아예 작정을 하고 시작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대구에서 전통주 교육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었기에, 자료 정리도 제 때 제 때 하고 진짜 부지런히 공부했다. 일주일에 두 번씩 열차로 총 6개월을 오갔으니 SRT 바퀴 하나는 제 돈으로 산 거 아니겠나.
깜짝 놀랐던 게 교육생 상당수가 20대 후반에서 30대 후반의 젊은층이란 점이었다. 한 반이 30명이었는데, 나이로 따지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제 나이가 많았다.
-이처럼 젊은층에게까지 전통주가 인기를 끄는 매력은 뭔가.
▶만드는 입장에서 맥주와 비교하자면 전통주가 훨씬 재미있다. 술이 되는 과정에서 그렇다. 전통주는 술이 잘 되거나 잘못될 수 있는 변수가 많기 때문이다. 반면 맥주는 순서를 지키며 레시피대로 만들면 원하는 맛이 딱 나온다. 다시 말해 맥주는 단순한 편인 반면 전통주는 굉장히 복잡하다. 그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기에 맛이 다양하고 좋을 수밖에 없다.
제가 운영하는 한국발효술교육연구원에선 옛 문헌에 기록된 레시피를 따라 술을 빚고 교육한다. 전통주 명인으로 꼽히는 박록담 선생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우리 전통주는 523종, 만드는 방법은 1천가지가 넘을 정도로 다양하다. 이렇게 많은 술과 술을 빚는 방법이 고문헌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가끔씩 대학 등에서 '전통주 인문학'을 테마로 강의를 한다. 지난주에도 경북대 최고경영자 과정 강의를 했는데 강의 제목이 '한국 전통주가 왜 맥주·와인보다 더 고급술인가'였다. 실제 만드는 과정도 그렇고, 결과물의 맛과 향을 봐도 와인이나 맥주보다는 우리 전통주가 훨씬 고급이다.
-이번 책 출간에 앞서 지난해엔 '전통주로 빚은 인문학'이란 책을 냈다. 전통주가 지닌 철학적 의미와 문화적 가치를 잘 풀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실 우리 전통주엔 이야기가 굉장히 많이 들어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 전통주의 가장 큰 매력은 스토리라고도 볼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우리 전통주는 명리학과도 관련이 깊은데, 구기자술도 그 중 하나다. 술을 빚는 날짜를 딱 정해놓았다는 점에서다. 뿌리는 1월 첫 인일(寅日)에 채취해 잘게 썰어 그늘에서 말려두었다가 2월 첫 묘일(卯日)에 술을 빚는다. 잎은 사월 첫 사일(巳日)에 채취해 5월 첫 오일(午日) 담고 꽃은 7월 첫 신일(申日)에 따서 말려두었다가 8월 첫 유일(酉日) 담는다. 열매는 10월 첫 해일(亥日)에 채취하고 11월 첫 자일(子日)에 담는 식이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엔 이런 이야기도 있다. 한 선비가 길에서 소녀를 만났는데, 그 여인이 흰머리가 난 팔구십 세쯤 돼 보이는 늙은이를 마구 때리고 있었다. 선비가 이유를 묻자 여인은 이 노인이 자신의 셋째 아들이라고 했다. 선비가 여인에게 늙지 않는 이유에 대해 물자 여인은 구기자주 만드는 법을 가르쳐줬다. 선비가 집으로 돌아와 일러준 방법대로 구기자주를 만들어 먹었더니 300년을 살아도 늙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어느 지역에서 어떤 재료로 술을 만들었는지도 중요하지만 술에 얽힌 스토리를 알고 마시면 매력은 배가 될 수 있다.
-최근 전통주 분야의 권위 있는 대회인 '대한민국가양주대전 궁중술빚기대회'에서 은상을 받았다. 직접 좋은 술을 만들어야겠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나.
▶처음엔 양조장을 해볼까하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교육을 하게 되면서 양조장에 대한 꿈은 접었다. 교육자가 제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대회의 경우 전국에서 250명 정도가 출품했는데 본선 진출자 40명 가운데 4명이 저희 교육생이었다. 당시 저는 부재료로 고수 씨앗과 귤 껍질을 써서 은상을 받았다. 호가든 맥주에 고수 씨앗과 오렌지 껍질이 들어가는 점에서 착안했다. 대회 당일 반응이 상당히 좋았던 터라, 이 레시피는 지난해 합천에서 양조장을 낸 제자에게 줬다. 이처럼 양조장을 창업했거나 창업을 준비하는 이들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도록 도와주는 게 제가 할 일인 것 같다.
-전통을 지켜나간다는 점에서 보람도 클 것 같다.
▶교육생들에게 늘 하는 얘기가 있다. 요즘은 양조장을 하더라도 술만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양조장 자체가 주민들과 소통하는 문화 공간이 돼야 한다고 말이다.
이 일을 하면서 가장 재미있는 건 술 빚는 방법만을 가르치는 게 아닌, 술에 대한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는 거다. 듣는 이들도 무척 재미있어 한다. 우리 전통문화를 알린다는 점에서 의미도 크다.
우리 전통주 중에 도소주라는 게 있다. 잡을 도(屠), 사악한 기운 소(蘇), 술 주(酒)를 써서 사악한 기운을 몰아낸다는 의미의 도소주는 설날 아침에 온가족이 동쪽을 향해 마시는 술이다. 고려 후기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역사가 오래 됐다.
한국발효술교육연구원에선 매년 설을 앞두고 도소주 만들기 행사를 열고 특강을 진행한다. 전통주를 현대적으로 복원해내는 일만큼, 술과 관련된 이런 이야기를 알리고 보존해나가는 일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한다. 매년 1권씩 전통주와 관련된 책을 내는 게 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