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도의 삶과 풍경
제주 서남단 바다 위에 떠 있는 가파도는 모슬포항에서 약 5.5㎞ 떨어진 작은 섬마을이다.
대정읍에 속한 이 섬은 어업을 주업으로 살아가는 주민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현재 135세대 219명이 거주하고 있다. 규모는 작지만 공동체 결속력이 강하고, 오랜 전통과 생활문화가 온전히 보존된 곳으로 평가된다.
가파도는 대정읍 내에서 유일하게 마을 단위 포제를 지내는 지역이기도 하다. 이는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전통 의례로, 섬 주민들의 삶과 신앙이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지를 보여준다.
과거에는 주민 자율 결의로 술 판매를 금지했던 이력도 있을 만큼 공동체 중심의 질서와 가치가 뚜렷한 마을이다.
지리적으로는 섬을 중심으로 북동쪽에는 송악산과 화순항, 중문과 서귀포가 자리하고 있으며, 북서쪽으로는 모슬포와 대정 일대 마을들이 위치해 있다. 사방으로 펼쳐진 검푸른 바다와 함께, 맑은 날에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동서로 길게 뻗은 제주도의 윤곽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풍경은 마치 비단 치마저고리를 곱게 차려입은 여인이 앉아 있는 모습에 비유될 정도로 아름답다.
섬의 또 다른 특징은 평탄한 지형이다. 최고 해발고도가 약 20m에 불과할 정도로 낮고 평평해 천천히 걸으며 풍경을 감상하기에 적합하다. 높은 건물이 없어 시야를 가리는 요소가 없고, 바다와 하늘, 들판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개방감이 돋보인다. 이러한 지형 덕분에 자전거 여행지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마을 곳곳에는 제주 다른 지역과는 다른 독특한 돌담이 눈길을 끈다. 일반적으로 현무암을 사용하는 제주와 달리 가파도에서는 바닷물에 닳아 매끈해진 마석을 활용해 담을 쌓는다.
또한 바람이 강한 환경에 맞춰 돌담을 성글게 쌓아 바람이 통과하도록 한 구조 역시 이 지역만의 생활 지혜다.
역사·문화적 자원도 풍부하다. 가파도에는 제주 전역에 분포한 고인돌 180여 기 중 절반이 넘는 약 95기가 집중돼 있다.
이와 함께 해녀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해신당과 마을 수호신을 모시는 서낭당, '까마귀돌', '보름바위', '어멍아방돌' 등 신앙적 의미를 지닌 장소들이 해안을 따라 이어진다. 이러한 요소들은 섬 주민들의 삶과 신앙, 자연이 하나로 얽혀 있음을 보여준다.
자연환경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가파도는 사시사철 낚시꾼들이 찾는 명소로, 풍부한 어자원을 자랑한다. 동시에 섬 전체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방문객들은 이곳에서 육지와는 다른 섬만의 생활 방식과 정서를 체험할 수 있다.
거친 바다와 맞서며 살아온 주민들의 삶은 꾸밈없이 진하고, 그 속에서 느껴지는 인간적인 온기는 가파도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초록 물결로 물드는 섬
가파도의 진가는 봄에 더욱 빛난다. 매년 4월이 되면 섬 전체가 초록빛 청보리로 뒤덮이며 장관을 이룬다. 원래 보리는 바닷일로 바쁜 주민들이 손이 많이 가지 않는 작물을 선택하면서 시작된 것이었다. 씨를 뿌리면 비교적 쉽게 자라는 보리의 특성 덕분에 자연스럽게 재배가 이어졌고, 시간이 흐르며 지금의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냈다.
가파도의 보리는 키가 1m 이상 자라는 재배종으로, 바람이 불 때마다 파도처럼 일렁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여기에 노란 유채꽃까지 더해지면, 초록과 노랑이 어우러진 색채 대비가 만들어내는 풍경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 된다.
돌담과 바다, 그리고 청보리가 어우러진 모습은 제주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독특한 경관이다.
이러한 자연환경은 관광 자원으로 발전하며 가파도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특히 올레길이 조성되면서 방문객들이 섬을 한 바퀴 돌며 다양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게 됐고, 곳곳에 마련된 포토존과 벽화 골목은 여행의 재미를 더하고 있다.
◆제15회 가파도 청보리 축제
이 같은 청보리 풍경을 배경으로 열리는 가파도 청보리 축제는 가파도를 대표하는 봄 축제다. 올해로 15회를 맞는 이번 축제는 5월 17일까지 한 달간 가파리 일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축제 기간 방문객들은 청보리밭을 직접 걸으며 자연을 체험할 수 있다.
대표 프로그램인 '청보리밭 올레길 걷기'는 돌담 사이로 이어진 길을 따라 보리밭을 누비는 체험으로, 가파도의 풍경을 가장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콘텐츠다. 이와 함께 오카리나와 통기타 공연 등 소규모 음악 프로그램이 마련돼 섬의 여유로운 분위기를 더한다.
참여형 프로그램도 다양하다. 소망 연날리기, 즉석 노래방, '황금열쇠를 찾아라' 같은 이벤트가 관광객의 참여를 유도하며, 지역 특산물인 소라를 활용한 경매 행사도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이는 단순한 체험을 넘어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하는 요소로 평가된다.
무엇보다 축제의 가장 큰 매력은 자연경관이다. 청보리밭 사이로 한라산과 산방산, 송악산이 어우러진 풍경은 어디에서도 쉽게 접할 수 없는 장관을 만들어낸다. 바람에 흔들리는 보리 잎이 서로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소리는 방문객들에게 색다른 감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축제 기간 가파도 입도는 운진항에서 출발하는 정기 여객선을 이용하면 된다. 항해 시간은 약 10~15분으로 비교적 짧으며, 축제 기간에는 운항 횟수가 하루 18편까지 확대된다. 접근성이 개선되면서 더 많은 관광객이 가파도를 찾을 것으로 기대된다.
가파도청보리축제위원회는 이번 축제를 통해 지역 특산물의 산지 직거래를 활성화하고, 섬만의 독특한 문화 콘텐츠를 기반으로 브랜드 가치를 높인다는 계획이다.
◆섬의 일상·축제가 만드는 가치
가파도는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삶이 조화를 이루는 공간이다. 평소에는 조용한 어촌마을로서의 일상을 유지하다가, 봄이 되면 청보리 축제를 통해 외부와 소통하는 창구를 마련한다. 이 과정에서 섬의 전통과 자연, 주민들의 삶이 하나의 콘텐츠로 재구성된다.
청보리 축제는 단순한 볼거리 제공을 넘어 지역 경제와 공동체 유지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관광객 유입을 통해 소득이 창출되고,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프로그램은 공동체 결속력을 더욱 강화한다.
무엇보다 가파도의 가장 큰 가치는 '느림'과 '여유'다.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의 일상과 달리 이곳에서는 바람과 파도, 계절의 흐름에 맞춰 삶이 이어진다. 청보리 물결 사이를 걷다 보면 일상의 소음은 사라지고, 자연의 소리만이 남는다.
이처럼 가파도는 자연경관과 전통문화, 그리고 사람의 삶이 어우러진 제주 속 또 하나의 제주다.
청보리 축제를 계기로 더 많은 이들이 이 섬을 찾고, 그 속에서 진정한 쉼과 여유를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제주일보 진주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