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영국 왕실의 재정 고문인 토마스 그레셤(1519~1579) 이 남긴 "악화가 양화를 구축(驅逐)한다"는 말은 지금도 유용한 통찰이다. 1558년 그레셤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게 '좋은 돈과 나쁜 돈은 함께 유통되기 어렵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당시 영국은 재정 압박을 덜기 위해 금과 은의 함량을 낮춘 화폐를 반복해 발행했다. 법정 액면가는 동일한데 금속 함량이 다른 화폐가 혼재하게 됐다. 왕실은 이들을 동일한 가치로 사용하라고 했지만, 사람들은 실질 가치가 높은 화폐는 보관하고 질 낮은 화폐부터 썼다. 결국 순도 높은 좋은 돈(양화)은 유통에서 차츰 사라지고 가치 낮은 돈(악화)만 남게 됐다. 왜곡된 제도가 합리적 선택을 거쳐 비효율의 증폭을 낳았다.
'양화는 숨고, 악화가 유통되는' 장면은 현재도 여전하다. 한계기업은 영업이익이 이자비용을 충당하지 못한다. 문제는 자금과 노동이 한계기업의 비효율 부문에 묶이면서 오히려 생산적인 기업은 기회를 잃게 된다. 퇴출이 지연될수록 혁신 속도도 늦어져 경제 전체의 생산성이 낮아진다. 글로벌 기업들은 자사주(自社株) 매입을 확대해 주주환원을 강조하는데, 자본 효율성 측면에서 의미있지만 동시에 장기 투자 여력을 잠식한다. 과수원을 가꾸기보다 열린 과일을 서둘러 따서 시장에 내다 파는 행위에 가깝다. 정보 시장에선 질보다 '얼마나 빠르게, 많이 노출되는가'가 중요해졌다. 정확성보다 반응을 우선하는 알고리즘에 밀려 단순하고 자극적인 메시지가 시장을 장악한다.
이들 현상은 공통 메커니즘을 가진다. 왜곡된 인센티브가 합리적이면서 왜곡된 선택을 불러오고, 이는 비효율의 누적으로 돌아온다. 그레셤의 법칙은 인간의 도덕성을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시스템이 잘못 설계돼 있으면,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행동할수록 결과는 더 나빠진다. 부동산 정책도 마찬가지다. 도덕적 호소가 아니라 구조의 교정(矯正)이 필요하다. 좋은 선택이 손해가 되는 환경에선 어떤 정책도 제 효과를 내기 어렵다. 한국 경제의 문제는 단순히 저성장이 아니다. 자본주의 시장이라는 경기장에서 공정성을 잃은 규칙이 난무(亂舞)한다면 선수의 실력과 무관하게 결과가 결정된다. 양화는 시장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돌아올 이유를 잃었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