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환의 세계사] 이란 전쟁…동서 문명의 가교 페르시아와 한국, 중국

입력 2026-04-12 13: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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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월성로 출토 유리. 국립 경주 박물관
경주 월성로 출토 유리. 국립 경주 박물관

고향 장날. 엄마 손잡고 장을 보러 나갔다. 맛난 고등어 한 손 사 들고, 석유 냄새 물씬 풍기는 새물내 꼬까옷 품을 때 마음은 풍선처럼 부풀었다. 어머니의 따스하던 손길은 우주 어딘가로 날아 올랐다. 하지만, 장날 들려오던 흥겨운 선율, 태평소(날라리) 소리는 아직도 엄마의 잔영처럼 아련하다. 태평소가 전통 악기인가? 저 멀리 이란 땅의 군악대 나팔 즈르나(zurna)가 당나라에 유입돼 수오나(唢呐, suona)로 바뀌고, 고려말 들어와 태평소(太平簫)로 자리 잡았다. 문화란 오랜 시간을 거치며 전파 전용되는 문화접변(文化接變, Acculturation)의 결과임을 깨달은 것은 거동이 불편해진 엄마를 모시고 장에 갈 나이가 돼서였다. 이란 전쟁으로 전 세계가 고통에 빠졌다. 이란은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지 역사로 살펴본다.

◆경주 국립박물관 로마 유리-서아시아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을 가진 역사고도 경주. 학창 시절 수학여행으로 한 번쯤은 가봤을 경주 국립박물관으로 가보자. 대릉원의 황남대총이나 천마총 등에서 출토한 고색창연한 유물들이 빛을 발한다. 그 사이로 투명하게 반짝이는 유물이 눈에 들어온다. 박물관이 아니라 생필품 매장 진열대에 놓여도 손색없을 산뜻한 유리 그릇이다. 현재까지 신라 땅에서 출토된 로마 유리는 경주 국립박물관에 전시중인 월성로 출토 유리 2점을 비롯해 황남대총 10점, 서봉총 3점 등 모두 25점이다. 여기에 국립중앙 박물관에 전시중인 가야의 합천 옥전리 M1 고분 출토 유리 그릇과 깨진 유리조각까지 합치면 숫자는 좀 더 늘어난다.

신라와 가야인이 이런 투명 유리를 만들었나? 경주 박물관 측 설명문을 읽어보자. "지중해, 서아시아로부터 수입된 것 같다". 입으로 공기를 불어 넣어 투명 유리를 만드는 취입식(吹入式) 제조법은 1세기경 로마제국 영토이던 오늘날 레바논 시돈(Sidon) 지역에서 발명됐다. 1세기 로마의 역사가 大플리니우스가 『박물지(Naturalis Historia)』에 인류사 유리 발명가는 페니키아인라고 기록한 페니키아 땅이다. 11세기 십자군 성이 잘 남아 있는 유적 도시 시돈은 지중해안에 자리한다. 그 레바논 지중해안부터 이란까지를 우리가 서아시아라고 부른다.

안칸 천황릉 출토 유리. 6세기. 도쿄 국립박물관
안칸 천황릉 출토 유리. 6세기. 도쿄 국립박물관

◆도쿄 국립 박물관 로마 유리-서아시아제

일본 도쿄 우에노 공원에 자리한 도쿄 국립박물관으로 무대를 옮긴다. 여기에도 유리 그릇이 탐방객을 맞는다. 우리나라에서도 출토되는 남색 유리(79년 화산재에 묻혔던 폼페이에서 제일 많이 출토되는 로마 유리 색) 그릇 주인공은? 일본 안칸 천황(安閑天皇, 재위 534년~535년)이다. 게이타이 천황(継体天皇)의 아들로 재위는 1년에 불과하고, 오사카 하비키노시에 묻힌 안칸 천황 무덤에서 유리가 출토됐다. 도쿄 국립박물관 설명문을 보자. "서아시아에서 수입됐다". 서아시아에서 로마 유리를 갖고 동아시아로 온 주역은 페르시아 상인일 가능성이 높다.

서안 출토 사산조 페르시아 주화. 북경 국가 박물관
서안 출토 사산조 페르시아 주화. 북경 국가 박물관

◆중국 북위-서아시아 유리 장인 데려다 제작

당시 중국은 남북조 시대(386년~589년)다. 한족은 양자강 이남으로 밀려나 남조를 세우고, 황하 유역의 중원은 선비족이 장악해 북조를 세운 시기다. 역사가 위수(魏收, 506년~572년)가 선비족의 북위(北魏, 386년~534년, 수도 대동, 낙양)를 다룬 100권 짜리 역사서 『위서(魏書), 일명 후위서』 <서역전(西域傳)>을 펼치자. 수도 도평성(都平城, 현재 북경 옆 대동)에 서역 유리 장인(匠人)을 데려다 유리를 대량생산 했다고 기록한다. 아울러 종교 즉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기독교+불교+조로아스터교 혼합해 3세기 사산조 페르시아 시기 창시)도 소개한다. 서역의 핵심 종교가 조로아스터교임을 말해준다. 조로아스터교는 중앙아시아와 이란을 지배하던 사산조 페르시아(224년~651년)의 국교다.

터번 쓴 서역인(페르시아인) 조각. 중국 제남 산동성 박물관
터번 쓴 서역인(페르시아인) 조각. 중국 제남 산동성 박물관

◆짜라투스투라의 유물, 서안 섬서성 박물관

"신은 죽었다". 절대가치가 무너진 시대 철학의 고뇌를 다룬 니체의 1885년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의 짜라투스투라가 조로아스터다. B.C.6세기 조로아스터가 창시한 조로아스터교(경전 「아베스타」) 신자 무덤이 중국 서안에서 발굴됐다. 남북조 시대 북주(北周, 557년~581년)에 살았던 소그디아나(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일대 페르시아 제국 영토) 출신 상인 무덤 유물을 서안 섬서성(陝西省) 박물관에서 만나 보자.

돌판을 붙여 길이 약 2.3m, 높이 약 60cm로 만든 침대형 돌의자(관 안치용) 배경석 벽면이 화려한 천연색 그림으로 가득하다. 돌을 깎은 부조에 화려하게 색을 입혔다. 소그드인 특유의 장례 서사에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의 의례를 접목한 유물로 상인이던 망자(亡者)의 생전 연회 장면, 사냥, 종교 의식(조로아스터교 불 숭배), 사후 세계 이야기가 그림 동화책처럼 이어진다. 연회 장면에는 페르시아 관악기도 나온다. 아마 태평소의 원형이 아닐까?

소그드 출신 조로아스터교도 무덤 그림. 6세기 말. 서안 섬서성 박물관
소그드 출신 조로아스터교도 무덤 그림. 6세기 말. 서안 섬서성 박물관

◆사산조 페르시아 사절단, 중국 10차례 방문

북경 천안문 광장 남측에 자리한 중국 국가 박물관으로 가보자. 신석기 시대 이후 다양한 유물이 중국 문명사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준다. 서안에서 출토한 사산조 페르시아 동전이 눈길을 끈다. 앞서 서안 섬서성 박물관의 소그디아나 출신 상인 조로아스터교도에서 보듯 상인이 들어와 살았다면 당연히 주화를 사용했을 것이다. 서안은 물론 해상 실크로드 출발지인 중국 남부 해안지대에서 페르시아 동전이 다수 출토된다. 페르시아 상인들이 동아시아를 오가며 교역에 종사했음을 말해준다. 상인만이 아니다.

『위서(魏書)』, 『수서(隋書)』, 『구당서(舊唐書書)』, 『신당서(新唐書)』 등의 기록을 종합하면 224년 아르다쉬르 1세가 창시한 사산조 페르시아는 중국과 우호 관계를 맺으며 5세기 이후 북위와 수나라, 당나라에 10차례 이상 13차례까지 공식 사절단을 보낸 것으로 기록된다. 외교(우호 관계 유지)와 무역(비단 ↔ 은, 향료, 보석) 이익을 위해 서로의 필요에 따른 결과였다. 매개 역할은 페르시아에서 중국까지 무역 네트워크를 갖고 있던 소그드인이 맡았다. 중국인들은 이때 들어온 페르시아 음악과 춤에 특히 매료됐고, 악기도 받아들였다.

◆페르시아 황족 중국 망명, 현대 이란-중국 밀착 선구

페르시아인들은 이슬람화된 뒤에도 해상실크로드를 장악하며 해상무역의 중추로 활약했다. 그 증거는 중국 복건성 천주(泉州)의 페르시아 모스크다. 중세 베네치아,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세계 최대 무역항의 하나인 천주에 1009년 건립된 모스크 청정사(淸淨寺)는 중국 내 다른 이슬람 모스크와 차별화된다. 페르시아 상인들이 페르시아 양식으로 직접 건립한 것으로 동서 문화 교류의 상징과도 같다. 지금도 천여 성상 원형 그대로 남아 모스크로 쓰인다.

◆현대 이란-중국 밀착은 당나라 때부터

651년 아랍 이슬람 제국에 사산조 페르시아가 붕괴될 때 마지막 황제 야즈데게르드 3세의 아들 페로즈 3세 일행은 당나라로 망명했다. 당 고종은 페로즈 3세를 '페르시아 왕'으로 인정하고, 극진히 대우한 것은 물론 군사 지원을 통해 사산조 페르시아 복원까지 시도했다. 현재 전쟁으로 도탄에 빠진 이란이 중국에 크게 의지하는 전통은 이미 1천4백 년 전 형성됐다.

페르시아 페로즈 3세 망명 3년 전 648년 김춘추(651년 태종 무열왕 즉위)도 장안으로 와 당태종을 만나 신라와 백제 침공을 논의했다. 그의 아들 김법민(661년 문무왕 즉위)은 아버지가 신라로 귀국한 뒤에도 650년까지 머물렀다. 7세기 말부터 신라의 많은 승려와 상인들이 장안으로 왔고, 페르시아인 거주지가 있는 장안에 신라인 거주지 신라방(新羅坊)이 들어섰다. 신라인과 페르시아인의 교류는 합리적 추론의 범주에 든다. 그 후손들이 1977년 서울 강남에 테헤란로, 테헤란에 서울로를 만들었다. 역사는 말없이 반복, 또는 반전되며 미래로 흘러간다.

역사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