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아쉬움이 남아… 허공 속에 묻혀야만 될 리어왕 외전 이야기." 고선웅 연출가를 미슐랭이 선정하는 3스타 별점의 '무대 위 셰프'라고 할 정도로, 극단 마방진 20주년으로 공연되고 있는 연작 중 <리어왕 외전>(극공작소 마방진, 공연기획사 '옐로밤' 공동제작)은 신작이라 할 만큼 비극성의 무게감을 확 덜어내고 고선웅의 레시피로 개발한 작품이다. 2012년 초연작임에도 유통기한이 없고 신선도와 공연의 맛을 유지하는 걸 보면, 신작 수준이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적 무게감을 덜어내고, 80대 리어왕 인생의 아픔을 트로트와 조용필의 「허공」으로 버무려, 거대한 유산을 상속한 뒤 자식들에게 버림받은 이 시대 아버지의 서사를 원작의 외전(外傳)으로 각색해 리어왕에 한국적이면서도 고선웅 연출 스타일로 새 생명을 불어 넣는다. 고선웅의 해석도, 작가의 외전서사를 붙이는 구라감각도 무대에서 만만치 않다.
◇ 이 시대 리어왕의 인생사, 고전의 감각적 리믹스.
120분 동안 몰아치는 배우들의 연기, 리어왕의 뻔한 스토리를 연극적 재현성이나 일루전(illusion)의 연출적 트릭에 기대지 않고, 하늘극장 원형무대 후면과 주변을 활용해 배우들이 의상과 소품을 걸치고 등장하며 마치 리어왕 외전 서사를 연극적 놀이성으로 달린다. 고선웅 작가의 다시 쓰는 <리어왕 외전>을 시선으로는 웹툰처럼 보고, 귀로는 트로트를 들으면서도 이토록 절묘하게 고전과 현대 서사의 비트를 감각적으로 믹싱해 매칭하는 걸 보면, 고선웅 연출은 확실히 관객을 위해 120분을 "어떻게 하면 관객들이 재밌게 보고 배우들은 놀 것인가"를 상상하고 즐기는 연출자 같다. 리어왕(이영석), 그리고 세 딸(거너릴·강지원, 리건·양서빈, 코딜리어·이지현) 등은 등장부터 리어왕 버전의 외전 서사를 서사적 놀이성으로 펼친다. 부모-자식 관계의 계급장을 떼고 시원하게 유산 상속을 요구하는 능청스러움부터 무대는 비극이 아닌 비극을 즐기는 메타적 놀이성으로 달린다. 연극이니까.
가족오락관 프로그램처럼 "아버지라 부르지 말고, 왕이라고 불러."라는 대사를 던지며 분위기를 띄우는 인물들의 해석까지, 버릴 것이 없는 무대다. 오락비극 형식을 빌려 고전을 고선웅표로 퓨전화한 양념들로 <리어왕>의 숙성된 고전성은 살아나면서도 현대적으로 다이어트를 시켰다. 그런데도 어허, 비극의 몸무게는 유지하면서도 몸의 탄력과 균형감은 더 세련되어졌다고 할까. 무대는 삼보일배를 돌고, 원작의 광대는 마치 펜싱 선수처럼 형상화된 거북이로 환생한 듯 리어의 인생을 마주한다. 원형무대에서 딸들과 사위들이 벌이는 공놀이는 마치 불교적 공(空)의 순환을 은유하는 장면처럼 보인다. 물질을 손에 쥐고 싶어도 공처럼 받아도 내 것이 아닌, 실체가 사라지고 주고받는 순간마다 소유가 물화(物化)되는 인생사 같은 공놀이는 결국 권력과 재산, 가족마저 붙잡을 수 없는 허상임을 드러내는 수행적 이미지에 가깝다.
탁월한 오브제 활용은 눈먼 글로스터에게는 시각장애인 보행 지팡이로, 그 외 앞을 볼 수 없게 된 인물들에게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보행 지팡이다. 그들의 인생과 삶, 그리고 인간의 물질적 욕망 또한 때로는 당구를 활보하듯 질주하는 인생처럼 보이지만, 결국 죽음으로 소멸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드러낸다. 리어커에 죽은 자를 싣고 원형무대를 도는 마지막 리어는 삶의 허무와 상실을 끌고, 불교의 공과 윤회로 순환하는 인간 존재가 끝내 공으로 소멸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보여준다. 딸들과 사위의 눈을 멀게 하고 자신도 사바세계로 떠나며 들리는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니 희망이 족할까."라는 트로트 멜로디는 버림받은 노년의 리어의 삶과 죽음을 희비극적으로 집약한다. 노래에서 울리는 쓸쓸함과 고요는 웃으면서도 충분히 비극적이며, 마지막 장면에서 대형 스크린으로 '효도합시다'라고 극장을 나가는 관객들 뒷통수에 대고 일갈하는 장면은 막장으로 달리는 현대판 리어 가족들을 향한 날카로운 펀치 한 방을 선물로 쥐여준다.
배우들의 연기는 어떤가. 리어왕으로 분한 이영석 배우의 장점은 살아가는 인간을 보여준다. 어눌한 음성, 일그러진 표정, 엉성한 왕관과 허술한 옷차림, 고전적이지 않은 일상의 대사 톤과 분위기, 대사를 한 템포 뒤에 받는 감정의 여백은 한 촌로의 농부처럼 살아온 인생이 왕이라지만 투박하면서도 이 시대에 가장 삶의 무게감으로 짓눌린 인간적인 리어이자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리어왕 외전>은 배우들의 연기도 장점이지만, 그 배우들의 쓰임새를 무대에서 극대화하는 연출자의 캐스팅 또한 탁월하다. 서사를 쫄깃하게 이어주는 천연 식용유처럼, 고선웅 퓨전 요리의 정점을 보여준다. 발성과 대사의 화력이 좋은 유병훈을 글로스터로, 켄트에 김윤태를 배치해 배우들의 소리, 움직임, 캐릭터 등 각자의 장점을 극으로 끌어모은 것도 <리어왕 외전>을 살려낸 고선웅 표 퓨전요리의 비법 아닐까. 세 딸과 에드먼드(견민성) 등 출연 배우들 모두 고선웅 표 집을 새롭게 짓는 배우들이다. 오락적 막장 비극 <리어왕 외전>은 4월 12일까지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공연된다. 된다면, 꼭들 보셨으면 한다.
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