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삼의 근대사] 산림녹화 원조는 조선총독부

입력 2026-04-06 14:2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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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하게 헐벗은 조선의 산. 구한말 전국의 대부분의 산들이 나무 하나 없는
비참하게 헐벗은 조선의 산. 구한말 전국의 대부분의 산들이 나무 하나 없는 '붉은 산'이었다.

조선 후기 인구가 늘면서 먹고 살기 위해 산림을 파괴하여 논밭을 조성했다. 이로 인해 비가 조금만 많이 내리면 토사로 인해 하천·강이 범람하여 자연재해가 빈발했다. 게다가 모든 토지는 국왕 소유라는 왕토사상에 젖은 조선왕조는 산림에 대한 소유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무주공산(無主空山)이었다.

산에 주인이 없다 보니 아무 산이나 자유로이 드나들며 벌채를 자행했다. 전 백성이 베다 쓰는 데만 열중했고, 누구도 나무를 심거나 가꾸는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다 보니 19세기 중반부터 민둥산 천국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정약용은 1804년 송정사의(松政私議, 소나무 정책에 대한 나의 견해)란 글에서 산림이 어쩌다 이 지경으로까지 되었는가를 분석했다. 그 결과 "하나는 나무를 심지 않는 것이오, 둘은 저절로 자라는 나무까지도 꺾어 땔감으로 쓰는 것이오, 셋은 화전민이 산 불태우는 일 때문이다. 심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데 쓰는 사람은 무궁하니 이 어찌 나무가 궁하게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한탄했다.

19세기 말 한반도를 방문했던 영국의 저명한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서울 주변의 산들을 목격한 뒤 "나무 한 그루 없이 붉은 흙과 바위가 가차 없이 드러나, 마치 거대한 해골들이 늘어선 것 같다"라고 기록했다(이사벨라 버드 비숍,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살림, 102쪽).

국수적 국사학자들은 통감부와 조선총독부의 삼림법이나 삼림령은 입법 취지가 산림 약탈이 주된 목적이었다고 주장한다. 또 총독부가 임적 조사 과정에서 수많은 민유림을 약탈하여 총독부 소유의 국유림으로 편입시켰다고 비판한다. 심지어 일제가 한반도 북부 지역 원시림을 남벌하여 일본으로 반출했다는 '양강(압록강·두만강) 유역 원시림 수탈론'까지 등장했다. 이런 주장은 얼마나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는 것일까?

한반도에서 인공 조림의 시동을 건 것은 통감부가 설치된 1906년부터였다. 이때부터 통감부는 최우선 사업으로 산림 녹화를 추진했고, 1910년 병합 후 조선총독부에 의해 인공 조림 사업이 본격화되었다.

1910년 병합 직후 총독부는 산에 나무가 심어져 있는 밀도를 전국적으로 조사(임적조사)하여 조선 임야분포도를 작성했다. 총독부 행정력을 동원하여 조사 결과 한반도 산림은 성림지(베어서 쓸 수 있을 정도로 자란 숲이 있는 지역)는 32%에 불과했고, 치수 발생지(시급히 나무를 심어야 하는 지역)가 42%, 무입목지(민둥산) 26%로 조사되었다. 산림 현실이 이랬는데, 무슨 산림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나섰다는 말일까?

한반도 산림 녹화의 첫 번째 주인공은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였다. 그는 부임과 더불어 치산(治山)·치수(治水)·치심(治心)을 정책 슬로건으로 내걸고 정열적으로 인공 조림사업을 추진했다.
한반도 산림 녹화의 첫 번째 주인공은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였다. 그는 부임과 더불어 치산(治山)·치수(治水)·치심(治心)을 정책 슬로건으로 내걸고 정열적으로 인공 조림사업을 추진했다.

◆산림 녹화 원조는 데라우치 총독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는 나무 심기에 비상한 관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부임과 동시에 치산(治山)·치수(治水)·치심(治心)을 정책 슬로건으로 내걸고 거국적으로 인공 조림 사업을 추진했다.

총독부는 병합 다음 해인 1911년 4월 3일을 식수일(植樹日)로 정해 국민 조림 운동을 전개했다. 각급 학교와 관청을 통해 애림(愛林) 사상을 고취했고, 기념식수에 앞장선 사람은 데라우치 총독이었다. 해방 후 이날을 식목일로 정하려 했으나, 하필 이날이 일본 선무 천황의 제일(祭日)이라 하여 이틀 늦춰 4월 5일을 식목일로 삼았다. 반일 정서가 일상화된 분들에겐 송구한 말씀이오나 대한민국 식목일의 원조는 조선총독부였다는 뜻이다.

조선총독부는 산림행정 전담 부서를 조직했고, 양질의 목재 추출을 관리하는 영림창을 출범시켰다. 각종 임업 연구와 조림 사업을 위해 1913년 광릉(2,800ha)과 1914년 의령원(서삼릉, 73ha)에 임업 시험소를 설치했다. 이곳에서 조선 각지에 심을 묘목 연구개발을 진행했다.

통감부 시절 제정한 삼림법은 국유림의 소유자 결정을 우선 과제로 삼았다. 무주공산의 산림에 주인을 정해 인공 조림을 책임지우려 한 것이다. 그런데 조선총독부의 1910년 임적조사 결과 조선 삼림이 심각할 정도로 헐벗은 상태임이 적나라하게 밝혀졌다.

그 결과 새로운 삼림령을 제정했다. 총독부가 삼림령을 제정한 이유는 산림 소유권 확정은 뒤로 미루고 우선 산림 녹화에 총력전을 전개하기 위해서였다. 즉, 주인을 정하기 전에 우선 나무부터 심고 보자는 것이 새로 제정한 삼림령의 기본 입장이었다. 그 결과 산주(山主)는 물론이고, 누구라도 책임지고 산에 나무를 심는 자에게 해당 산림에 대한 소유권을 부여하는 특전을 베풀었다.

1910년 총독부의 삼림령에 의해 조림 대부 제도가 도입되었고, 이 제도가 식민지 기간 내내 계속 사업으로 추진됐다. 이 제도는 조림 대상 산림에 성실하게 조림을 약속하면 그 사람과 임대계약을 체결한다. 계약기간이 종료된 후 조림 실적을 평가하여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으면 나무 심은 사람(조림업자)에게 해당 산지를 무상 양여하는 일종의 특혜 정책이었다. 이것이 산림 녹화 주의를 제일의 정책 슬로건으로 내건 총독부 산림정책을 성공시킨 제도라는 평가를 받았다.

1911년 총독부가 제정한 삼림령은 해방 후 한국 산림의 기본법으로 법적 권능을 행사하게 된다. 총독부 삼림령은 1961년 5·16 직후 신규 산림법으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조림 대부 제도의 골격은 그대로 산림법에 전승되어 한국 산림정책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산림 관련 법령 마련에 앞장선 사람은 조선총독부 초대 산림과장과 영림창장을 지낸 사이토 오토사쿠(齊藤音作)다. 그는 아카시아와 포플러나무 보급에 앞장섰고, 퇴임 후에도 평생을 헐벗은 조선 산하의 녹화에 이바지한 인물이다. 학계에서는 그를 임업 근대화와 녹화에 기여한 사람이자 산림 수탈의 지휘자로 비난한다.

한반도 민둥산을 푸르게 만들기 위해 청춘을 바친 이시카와 다쿠미. 그는 잣나무 양묘 기술을 연구하여 조선의 산을
한반도 민둥산을 푸르게 만들기 위해 청춘을 바친 이시카와 다쿠미. 그는 잣나무 양묘 기술을 연구하여 조선의 산을 '잣나무 동산'으로 만들려 했던 사람이었다.

◆조선을 잣나무 동산으로 만들려 했던 일본인

또 하나, 기억해야 할 사람은 아사카와 다쿠미(浅川巧)다. 그는 1914년 총독부 산림과 기사로 부임한 이래, 1931년까지 17년간 조선의 민둥산 녹화에 청춘을 바쳤다. 잣나무 양묘 기술을 연구하여 인공 조림의 37%를 잣나무 묘목으로 대체함으로써 조선의 산을 잣나무 동산으로 만들려 했던 사람이 이시카와 다쿠미다. 그는 1931년 4월 식수일 기념행사 준비로 과로가 쌓여 40세라는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나의 유해는 한국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총독부는 산림 녹화 사업을 체계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종자와 묘목을 조림업자들에게 무상 제공했다. 여기에 필요한 막대한 재원을 어떻게 조달했을까?

당시 헐벗은 민둥산은 남한 지역에 훨씬 많았다. 때문에 압록강·두만강 유역 등 북쪽 지역 국유림 벌목에서 나오는 수익금을 남한 쪽의 민둥산 녹화·사방사업에 투입했다. 이런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일제가 북부 원시림을 남벌하여 불법으로 일본으로 반출했다는 '양강 유역(압록강·두만강)의 원시림 수탈론'이 등장한 것이다.

1907년 통감부 시절부터 1942년까지 35년간 일본에 의한 인공 조림 실적은 236만 정보의 산야에 82억1천500만 본이 식재되었다. 1930년대 이후 일본은 만주사변·중일전쟁·태평양전쟁이라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전시하의 극히 어려운 시국에도 불구하고 총독부는 산림 녹화사업을 정열적으로 추진했다. 1930년부터 1942년까지의 식수 실적이 식민지 전 기간 식수의 61.4%를 차지할 정도로 이 기간에 집중적으로 인공 조림이 전개되었다.

압록강 상류 지역 원시림을 베어 수탈해 갔다는 주장이
압록강 상류 지역 원시림을 베어 수탈해 갔다는 주장이 '양강 유역 원시림 수탈론'이다. 그런데 총독부는 북쪽 지역 국유림 벌목에서 나오는 수익금을 남한 쪽의 민둥산 녹화·사방사업에 투입했다. 이런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일제가 북부 원시림을 남벌하여 불법으로 일본으로 반출했다는 '양강 유역의 원시림 수탈론'이 등장한 것이다.

◆산림 파괴 주인공은 한국인

통감부와 총독부의 40년에 걸친 산림 녹화 정책 덕분에 해방 무렵 한국 산야는 호랑이가 서식할 정도의 울창한 산림으로 변모했다. 울창했던 산림이 거덜 난 것은 해방 이후였다. 총독부 해체로 산림 감시 기능, 행정 체계가 붕괴하면서 도벌·남벌이 마구 자행된 탓이다. 게다가 1공화국 시절 먹고 살기 어렵다 보니 직업 군인들에 대한 예우를 제대로 해주지 못했다. 군대는 '후생사업'이란 명목으로 울창한 산림 마구 베어 군부대 운영비, 장교들 사리사욕을 채우기 바빴다.

1952년 유엔한국재건단(운크라) 소속 임업 전문가로 내한한 영국인 하워드의 보고서에 의하면 "일본으로부터 해방은 많은 사람들에게 벌목 허가증을 발부해 준 결과를 낳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어 톱과 도끼를 들고 산에 올라가 거리낌 없이 나무를 족쳐댔다.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이 한국의 산림을 망치는 전주곡이나 다름없었다"라는 기록이 발견된다.

1950년대 비참한 상태로 돌아간 한국 산림이 제 모습을 찾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박정희 정부는 1960년대 들어 강원도 탄전의 석탄으로 연탄을 만들어 전국에 보급했다. 그 결과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개막되었다. 대체 연료 보급 시스템이 구축된 후인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은 '치산녹화 10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10년 내에 산림 녹화를 완성한다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이때부터 거국적인 나무 심기 운동이 전개되었다. 제1차 치산녹화 10개년 계획은 6년 만에 108만ha에 29억 그루의 나무를 심어 조기 달성했다. 1979년 시작된 제2차 치산녹화 10개년 계획도 1년 앞당겨 1987년에 달성되었다. 1973년부터 1987년까지 14년간 녹화사업 실적은 총 48억 2천만 본의 묘목을 전국 196만 정보에 심었다.

이 수치를 통감부와 조선총독부 시절(35년간) 236만 정보에 82억1천500만 본 식재 실적과 비교해 본다. 식재 면적은 117.2%로 일정기보다 높지만, 묘목량은 86.4%로 일정기보다 적었다는 사실이 발견된다.

후쿠다 다케오 일본 총리는 "한국 하면 일제 시절부터 벌거벗은 산을 연상했다. 한번 파괴된 산림은 복구하기 곤란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인데, 박정희 대통령이 20년 미만의 집권 기간 중에 완전히 녹화에 성공한 것은 고도성장, 수출증대, 중화학공업 등 경제 업적보다 더 어렵고 값진 위엄"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산림 녹화에 관한 한, 박정희 이전에 총독부와 데라우치가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 같다.

김용삼 펜앤드마이크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