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대구 우손갤러리에선 '시지프스의 돌멩이'란 전시가 열렸다. 대구 1세대 대안공간인 '비영리전시공간 싹'의 개관 20주년 기념전이었다. 영리를 추구하지 않는 전시공간의 기념전을, 대구의 대표적인 메이저급 상업갤러리에서 열었다는 점에서 이례적이었다.
이보다 더 주목할 만한 건 비영리전시공간 싹이 지금껏 살아남았다는 점이다. 비영리전시공간 싹은 지난 2006년 9월 '대안공간 싹'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
대안공간(Alternative Space)은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 처음 시작됐다. 기존 제도권 내의 상업적인 전시공간에 대한 '대안'으로 생겨났다.
우리나라에선 1990년대 후반 서울에서 처음 등장했다. '대안공간 루프', '대안공간 풀',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등이 미술계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다. 젊은 작가들에게 대안공간은 자신의 상상력과 진보적 정신을 보다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장이 됐다.
이러한 영향으로 대구에서도 대안공간이 등장했다. 2006년 대안공간 싹을 시작으로 '쌈지마켓 갤러리', '작은공간 이소', '아트스페이스 펄' 등 많은 대안공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구의 1세대 대안공간 중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는 곳은 비영리전시공간 싹과 아트스페이스 펄 정도다.
비영리전시공간 싹은 인테리어 사업을 하는 김진석(53) 대표가 운영하고 있다. 김 대표는 지난 20년 동안 사비를 털어 지역의 청년 예술가들을 위해 개인전을 지원하고 기획전시를 선보였다. 최근 수성구 수성동 비영리전시공간 싹에서 만난 김 대표는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진 못 했다. 그래도 인생에서 가장 뜻 깊은 일이 무엇이었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주저함 없이 비영리전시공간 싹을 운영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대학에선 건축을 전공했다. 졸업 후 건축설계사무소에 들어가 실무를 배웠고 20대의 이른 나이에 독립했다. 이후 미술대학에 진학해 사업을 병행하며 회화를 공부했다. 학부를 마친 뒤 곧바로 홍익대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면서 서울을 오가는 생활을 했다. 2000년대 중반 서울엔 수많은 대안공간이 생겨났고 미술계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고 있었다. '서울엔 이렇게 난리인데 대구엔 하나도 없다고? 그렇다면 내가 만들어보자'라는 생각을 했다. 비영리전시공간 싹의 출발점이었다. 돌이켜보면 당시 대구에 대안공간이 한 곳이라도 있었다면 시작하지 않았을 거다.
-대안공간의 어떤 점에 이끌렸나.
▶실험적이지만 주류에서 활동하지 못하는 지역의 젊은 작가들이 좀 더 자유롭게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청년 예술가를 지원하는 전시 기획이나 창작 레지던시의 경우 공모를 통해 선정하는데 경쟁이 점점 치열해지다 보니 경력이 짧은 작가들의 경우 각종 공모 프로그램에 선정되기에 충분한 예술 활동 이력을 갖추기가 힘들다. 청년 예술가들이 각종 지원 사업에 지원하려고 해도 전시회와 같은 창작 활동 경력이 필요한 것이다. 미술대학을 갓 졸업한 청년들이 예술가로서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발판이 돼주고 싶었다. 상대적으로 기회가 많은 그룹전보다 개인전 형식을 지향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특히나 개관 초기엔 대학을 갓 졸업한 작가들 전시가 많았다. 그들에겐 첫 개인전이었다. 일부 작가들은 생애 첫 개인전을 감당하지 못해 전날까지도 작품을 완성하지 못 해 전시가 엉망이 된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서 개인전을 다루는 기술을 조금씩 알아가고 성장하지 않았을까 한다.
-기획전을 제외하고 한해 평균 4명의 작가에게 개인전 기회를 제공했다. 20년이면 100명 수준이다. 참여 작가 대다수가 젊었던 만큼 현재 미술계를 떠난 이들도 많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 점에서 속상하진 않나.
▶어림잡아 현재 작업을 하지 않는 이들이 80%쯤 되는 것 같다. 속상한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제가 하는 일이 개인적 이득을 위한 건 아니지만, 이 또한 투자고 지원이지 않나. 기껏 지원했더니 결국 미술계로 안 오고 그냥 가버리면 제 입장에선 굉장히 낭비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들이 이곳에서 개인전을 하면서 '저 나이에 벌써 개인전'이란 식으로 또래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고, 제가 선택하지 않은 젊은 작가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이나 '작업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동기가 된 것 같다. 그렇게 보자면 이 또한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한다.
-20년 세월 동안 경제적으로 힘들거나 감당하기에 버거울 때도 있었을 것 같다.
▶2008년과 2016년 두 차례 정도 사업이 상당히 힘든 때가 있었다. 특히 2016년쯤엔 계속 운영하는 게 맞는지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하지만 그땐 이미 이곳이 젊은 작가들에게 무척 소중한 공간이 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개인전을 하기 위해 매년 30명이 넘는 젊은 작가들이 지원할 정도였다. 진지하게 고민을 했지만 도저히 없애진 못하겠더라. 세월이 흐르며 자연스레 이 공간에 부여된 책임감 때문이었다.
2012년쯤 독립큐레이터로 활동하던 서희주(현 인문예술공동체 아르케 대표) 선생을 만나게 된 게 큰 힘이 됐다. 본업이 따로 있다 보니 그전까지는 이 공간을 조금은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무보수 재능기부 형식이었지만 서 선생이 디렉터로 합류하게 되면서부터 공간운영의 체계를 잡아갈 수 있었다. 싹의 대표적인 개인전 지원 프로그램인 '싹수 프로젝트'도 서 선생 합류 이후 제대로 자리를 잡게 됐다.
2018년부터 지금껏 이어오고 있는 청년 큐레이터들과의 협업도 서 선생의 역할이 컸다. 싹은 이들과의 협력을 통해 보다 탄탄한 기획전시를 선보일 수 있었다. 2020년부터는 '쓱싹 프로젝트'라는 평론가 발굴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다. 20~30대 신진 평론가를 발굴하고자 기획한 프로젝트다.
-최근 우손갤러리에서 선보인 20주년 기념전은 어떻게 이뤄졌나.
▶대구를 대표하는 컬렉터 중 한명으로 꼽히는 김인한 유성건설 회장님과의 친분에서 비롯됐다. 워낙 미술계에 인맥이 두터운 분이라, 어느 날 만난 자리에서 20주년 기념전 취지를 설명하면서 무상으로 쓸 수 있는 공간을 알아봐주십사 부탁을 드리게 됐다. 처음엔 이곳저곳을 좀 알아봐주시다가 며칠 뒤쯤 "그냥 우리 공간(김 회장의 딸이 대표를 맡고 있는 우손갤러리)에서 하라"고 하시더라. 게다가 전시 오픈식에도 직접 와주셨다. 뒤풀이 자리까지 참석하셔서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덕담을 건넸다. 참 감사한 일이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지난 20년 동안 지역 미술계는 많이 바뀌고 발전했다. 그런 변화 속에서 저희 공간도 정체성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고, 더 이상 '대안공간'이란 명칭은 적절하지 않다는 판단에서 2015년 '비영리전시공간 싹'으로 이름을 바꿨다.
운영 면에서도 조금은 달라졌다. 초창기엔 전시 주체가 새내기 작가 중심이었다면, 지금은 미술계에 이미 속해 꾸준히 작업을 하고 있고 주류 미술계에선 알려지지 않았지만 발전 가능성이 있는 작가를 직접 '발굴'해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결국 처음 출발할 때 가졌던 '젊은 예술가들과 늘 함께하겠다'는 정신은 이어가면서 시대의 흐름에 맞게 역할을 고민하며 조금씩 변화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현재 함께하고 있는 청년 큐레이터들과의 첫 만남 때인 2018년 때의 일이다. 당시 그들은 "대표님 이거 계속 하실 건가요"라고 제게 물었다. 전 한치의 망설임 없이 "계속할 거다"라고 답했다. 당시를 떠올려 보자면 지금도 그 마음엔 변함이 없다. 비영리전시공간 싹을 운영한 게 53년 제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일인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