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안에서 길을 잃어라./ 연인들의 생명은 죽음 속에 있다./ 네 가슴을 잃어버리기까지는/ 사랑하는 이의 가슴을 얻지 못하리.'
저녁 퇴근길 차에서 문득 루미의 시를 떠올린다. 가수 변진섭의 노래(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가 라디오에서 세계 뉴스 막간에 흘러나온 탓이기도 하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 대만을 둘러싼 중일 갈등, 돈로주의, 미국, 이란의 대치로 인한 호르무즈해협 봉쇄, 서울 북쪽의 소식들을 귀가 쟁쟁하도록 앞에 들은 때문이다.
챗GPT와 AI, AGI마저 창궐하여 시까지 줄줄 써내려간다는 이 시기에 13세기 수피 시인의 잠언(箴言)이 무슨 소용이랴 싶다가 페르시아 시인으로 알려진 잘랄루딘 루미가 실제 태어난 호라즘 제국의 히바를 또 떠올린다. 13세기 트란스옥시아나의 상황이나 19세기 그레이트 게임이 지금과 비슷했을 거란 혼자 생각을 하며.
◆13세기, 호라즘 제국과 칭기즈칸
1219년 중앙아시아 대부분을 지배하던 호라즘(현재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과 인도 일부에 걸친 대제국)은 칭기즈칸의 무자비한 공격을 받았다. 튀르크 페르시아계 이슬람왕조로서 당시 '제2의 알렉산더' '지상의 알라' '알라의 그림자'로 불린 '샤' 무함마드2세의 최대 전성기였다. 당시 금나라 정복 중이라 전쟁물자 조달이 반드시 필요했던 칭기즈칸은 실크로드 교역을 위해 사신과 대상(隊商)으로 구성된 통상 사절단을 자신의 경쟁자로 여긴 호라즘의 샤에게 보냈다. 그러나 몽골에서 가장 가까운 제국의 초입 도시 오트라르의 탐욕스러운 이날추크는 대상의 재물을 빼앗고 사신들을 도륙해버렸다.
일설에 의하면 칭기즈칸은 이때까지도 대제국 호라즘과 척을 질 생각은 없었던 듯 분노를 억누르고 재차 사신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만 믿고 제국의 최전성기를 구가해 자만이 하늘을 찔렀던 무함마드2세는 외척 이날추크를 편들어 사신의 일부는 목을 치고 일부는 수염을 깎아 몽골로 돌려보냈다. 이에 격분한 칭기즈칸은 제국의 절멸을 결심했고 9만 명의 기마 전사들과 공성기술자들을 보내 우르겐치, 히바, 부하라, 사마르칸트를 휩쓸어버렸다. 이 사단의 주역인 이날추크 얼굴에 끓는 은을 끼얹고 거의 모든 주민들을 살해해 도시마저 초토화했다, 그야말로 호라즘제국 존재 자체를 잔혹하게 역사에서 지워버리고 말았다.
2007년 여름, 키질쿰('붉은 사막'이라는 뜻)은 그야말로 녹아내릴듯 들끓었다. 가도 가도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붉은 흙이 널린 사막과 창도 없는 버스 안은 에어컨 고장인지 후끈거렸다. 땀 알러지가 있던 나는 어릴 때 이후 처음으로 목과 팔목에 땀띠가 돋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버스 기사에게 '에어컨디셔너 노 플레이'를 외쳤지만 우직한 우즈베키스탄 기사는 들은 척도 않고 앞만 보고 달렸다. 혹시 몽골인과 닮은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아닐까.
1220년 칭기즈칸은 급기야 수도 사마르칸트를 버리고 도주한 무함마드2세를 추격하라 맹장(猛將) 수부타이에게 명령했다. 무함마드2세는 아무다리야강을 건너 서쪽으로 내달려 죽음의 사신처럼 섬뜩하게 추격하는 몽골군을 1년 동안 피해 다니다가 결국 카스피해의 외딴섬 아베스쿤에서 병사했다. 끝까지 쫓아온 수부타이는 카스피해 너머 조지아를 탐색해 후에 이 곳을 몽골의 유럽 침략 교두보로 삼게 된다. '그토록 넓은 영토를 다스리던 내가 지금은 무덤 하나 정할 땅조차 없이 죽는구나…' 죽어가면서 무함마드2세가 남겼다는 말이다.
몇 년에 걸친 '역사 공부를 겸한 작가콜로퀴엄 실크로드 탐사'는 주로 여름에 진행되었다. 평소 실크로드에 관심이 컸던 직장인, 주부, 교직자들이 많이 참여했다. 당시 탐사에 동행한 박순국 교수가 최근 진행하는 '실크로드, 길 위의 길을 열다(영남대 대구캠퍼스)' 강좌에서 다시 수많은 유네스코 역사도시 히바와 보석상자 같은 부하라 등 중앙아시아 사진을 보니 새삼스럽다. 밀레니엄 초기, 전문가들과 함께 역사 공부를 하며 중국 시안에서 중앙아시아, 이란, 튀르키에를 거쳐 러시아, 로마까지 실크로드 육로와 해로를 몇 년에 걸쳐 탐사하던 대원들 모두 그립다. 잘 지내시죠.
중앙아시아 루트는 최근에 고속열차가 놓여 전보단 훨씬 여행이 순조롭고 더욱더 도시가 정교하게 정비되어 있다고. 그때 에어컨이 고장난 버스가 달리던, 우리나라 건설회사가 수주를 맡은 것인지 공사 중인 도로가에 쵸코파이 봉지와 푸른 소주병이 뒹굴던 그 사막길도 이젠 말끔하게 닦였을 터다. 이젠 그런 버스 없어요, 하하. 늘 일출과 일몰 시간에 맞춰 찍던 실크로드 사진과 그때는 없었던 우리 KTX와 흡사한 고속열차를 강의실 화면에 커다랗게 비추며 박 교수님이 웃는다.
당시 칭기즈칸의 몽골군에 격렬하게 저항했던 히바 주민들은 거의 절멸했고 도시는 그야말로 모래성처럼 폐허가 되었다. 후대 사가(史家)들은 그때 무함마드2세가 오만하지 않게 칭기즈칸과 외교적으로 잘 해결했더라면 세계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지만 역시 모든 역사에는 가정이 없는 법. 이러한 비극 속에서도 생은 계속 되고, 가장 어두운 밤이 지나면 해가 떠오르듯 아랄해와 카스피해를 지나는 유럽 루트, 사마르칸트와 부하라를 거쳐 중국과 인도로 통하는 동방 루트 중앙에 위치한 히바는 수백 년에 걸쳐 다시 실크로드의 중심도시로 자리잡아갔다.
칭기즈칸의 사후 그 자손들이 세운 차가타이칸국, 14세기 티무르제국, 16세기 히바칸국, 19세기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 등을 거치며 히바는 실크로드 요충지, 노예매매 시장, 구(舊) 소련의 위성도시, 독립한 우즈베키스탄의 유네스코 역사도시로 뜨거운 햇볕과 모래 그 너머 광활한 초원과 사막의 지평선과 짚을 넣은 흙벽돌로 쌓아 외벽에 진흙을 바른 거대한 이찬 칼라(Itchan Kala, 성채)와 바깥 성채 디샨칼라로 우리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사막의 바람과 시간에 쏠려 전설이 된 도시
섭씨 52도, 히바는 강렬한 햇빛 아래 눈이 부셨다. 살갗이 비스켓 껍질처럼 바싹 구워질 것 같은지 온몸을 흰 천으로 가린 여인들이 그늘에서 양탄자 베틀에 앉아 우릴 쳐다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애잔하게 아잔(azān, 이슬람 기도 시간을 알리는 소리)이 울려 퍼졌다. 고개를 들어높고 푸른 첨탑을 올려다 봤다. 중앙아시아에선 가장 높은 호자 미나렛(minaret)이라 했다.
19세기 히바칸국의 아민 칸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70m 탑을 세우리라 공언한 뒤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해 20미터 미완의 탑으로 남게 되었다는 칼타 미나렛은 그 전설만큼 아련하고 아름다웠다. 호자 미나렛은 내부를 통해 꼭대기에서 히바 전경을 볼 수 있지만 칼타 미나렛은 출입이 통제되어 탑 외부만 봐야 했다.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의 알라딘이 양탄자를 타고 탑 주변을 날아다닐 것만 같아 아름다움에 대한 칸의 야욕마저 동화처럼 여겨질 만큼 아름다웠다.
저마다 섬세한 문양을 새긴 212개의 나무기둥이 있는 주마 모스크를 보고 나와 들른 왕궁인 히바성 동문 광장은 옛 노예시장이었다고. 밧줄이나 족쇄에 묶은 투르크인, 카자흐인, 러시아 소년까지 마구잡이로 잡아다 노예로 거래를 했다니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야만의 얼굴이 참으로 어디까지인가 싶어 아득해졌다. 1873년 러시아인 노예 매매에 격분한 짜르의 침략으로 그 행위가 마침내 멈추어졌다 하니 전쟁의 얼굴 또한 얼마나 여러 가지인가. 히바에서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를 한 움큼 쥐고 몸피가 말라 하얗게 화석처럼 굳은 나무와 그 너머 사금들 반짝거리는 사막 그리고 풀이 드문드문한 오아시스를 바라본다. 역시 사막에선 다시 울려 퍼지는 아잔처럼 무언가 늘 서글프고 슬프다.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