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문으로 다시보는 그때 그사건
엄여인 보험살인…무기징역 선고
새벽 2시 집 안은 고요했다. 누군가는 깊이 잠들었고 누군가는 몽롱한 기운에 몸을 뉘었다. 그 정적을 깨고 불길이 천장을 타고 번졌다.
문제는 불이 아니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도망치려 해도 팔다리가 느슨하게 풀렸다. 이미 약이 들어간 음료가 목을 넘어간 뒤였다.
◇남편 둘다 사망했는데…의심도 못했다
법원이 무기징역을 선고한 이른바 '엄여인 사건'은 겉으로는 연쇄적인 사고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상은 약물을 이용해 사람을 무력화한 뒤 상해를 가하고, 이를 우연한 사고로 위장해 보험금과 돈을 노린 계획범죄였다.
피고인 엄모 씨는 약을 음료에 섞어 한꺼번에 다량 복용하게 하는 방식으로 주변 사람들의 의식을 흐리게 했다. 이후 밀치거나 찌르고 화상을 입히는 수법이 반복됐다.
처음 표적이 된 사람은 남편 A씨였다. 1997년 무렵 만나 동거를 시작했고 1998년 4월 혼인신고를 했다. 결혼 생활은 돈 문제로 흔들렸다. 2000년 2월 두 살 딸이 뇌진탕 등으로 숨졌다.
그 뒤 엄 씨도 우울증 치료를 받았다. 삶이 급격히 꺾이던 시기 엄 씨는 '사고'를 위장해 범행을 저질렀다.
2000년 4월 1일과 28일, 남편에게 약을 먹인 뒤 밀어 넘어뜨려 뇌진탕을 입혔고, 같은 해 5월에는 오른쪽 눈을 찔러 실명시켰다.
그런데도 끝이 아니었다. 2001년 6월에는 끓는 기름으로 얼굴에 화상을 입혔고, 그해 9월과 2002년 1·2월에는 흉기를 이용한 상해가 이어졌다. 범행은 언제나 약물과 함께 였다. 남편은 여러 합병증에 시달리다 2002년 3월 27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엄 씨는 이 모든 상해를 "계단에서 넘어졌다"는 식의 사고로 꾸며 보험사에 허위 신고했고, 2000년 5월부터 2002년 11월까지 두 보험사로부터 58차례에 걸쳐 2억 8천여만 원을 받아냈다.
장례가 끝난 뒤 공백은 오래 가지 않았다. 엄 씨는 곧바로 나이트클럽에서 B씨를 만났고 2002년 5월 무렵 동거를 시작했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익숙한 방식이 재현됐다. 그해 11월 약물을 먹여 넘어뜨렸고, 12월에는 눈을 실명시켰다. B씨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상으로 치료를 받던 중 2003년 2월 숨졌다. 이 사건에서도 엄 씨는 보험금 3천880여만 원을 챙겼다.
다른 가족도 노렸다. 2003년 7월 어머니의 주스에 약을 타 먹여 실명시켰고, 같은 해 11월에는 오빠에게 약이 든 술을 먹여 양쪽 눈을 잃게 했다. 보험금 사기는 계속됐다.
화재가 범행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2005년이었다. 엄 씨는 가족이 살던 아파트를 팔아 돈을 써버린 뒤, 서울에 집을 마련했다고 거짓말을 해왔다. 거짓이 드러날 위기에 처하자 또다시 범행을 계획했다.
거짓말이 들통날 상황 엄 씨는 또다시 범행을 계획했다. 2005년 1월 9일 새벽 2시 오빠와 남동생에게 "석류가 눈에 좋다"며 약을 섞어 먹인 뒤 불을 질렀다. 불길이 번지는 동안 약을 먹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방어할 능력이 떨어진 상태였다. 두 사람은 화상을 입었다.
엄 씨의 범행은 지인에게도 뻗었다. 2005년 2월 1일 새벽 2시 지인 C씨의 집에 얹혀살던 엄 씨는 "방을 비워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자 또 다시 방화를 저질렀다. 그곳에서 잠을 자던 지인의 남편은 화상 치료를 받다가 결국 사망했다. C씨와 다른 가족들도 유독가스를 마셨다. 호의로 문을 열어줬지만 삶을 앗아간 배신으로 돌아왔다.
2월 7일 오후에는 병원에서 알게 된 지인 D씨에게 약을 섞은 딸기를 먹게 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 뒤 카드를 훔쳤다.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빼내고, 병원 원무과에서 오빠의 병원비를 결제했다.
같은해 4월 또 다른 병실에서 알게된 지인 E씨가 피해자가 됐다. E씨에게는 "다이어트 약"이라고 속여 약을 먹게 한 뒤 눈을 실명하게 했다. 그리고 며칠 뒤 입원실로 들어가 링겔 주사약에 약물을 투약해 열과 심장발작 증세 등을 일으키도록 했다.
이렇게 두 남편 모두 비슷한 방식으로 사망했고, 어머니와 오빠 등 피해자들은 시각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했다. 남동생은 화상을 입고, 방화로 한 가정의 가장마저 숨졌다. 이 모든 게 엄 씨의 소행이었다.
피해자들은 공통적으로 "사고를 겪기 전 엄 씨와 단 둘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평소에 온화했던 엄 씨의 모습 때문에 그를 의심하지 못했다고 한다.
◇보험금 전부 사치로 탕진…무기징역 선고
법정에서는 엄 씨의 평소 행태에 대한 주변 진술도 이어졌다.
피해자인 남편의 형수는 "피해자가 이삿짐센터 직원으로 일하며 고생해 번 돈으로 엄 씨에게 메이커 옷만 사 입히고 외제품만을 사 먹였다"고 들었다고 진술했다. 사치가 심했다는 주장이었다.
엄 씨 집에서 일한 한 파출부는 "꽃게가 먹고 싶으면 반드시 사다 먹고, 사고 싶은 옷이 있으면 가격이 비싸도 반드시 구입했다"며 "일류 갑부처럼 돈을 썼다"고 말했다.
일주일에 6번가량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외출해 쇼핑이나 찜질을 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함께 쇼핑을 다녔다는 증인은 엄 씨가 명품을 좋아하고 집착성과 쟁취욕이 강했다고 진술했다.
엄 씨는 항소심에 제출한 서면에서 보험금 일부를 병원비와 간병비로 썼고, 쇼핑 등 개인적 용도로도 사용했다고 밝혔다. 결혼 전부터 쇼핑에 중독돼 있었고, 그런 '낙'이 없었다면 결혼생활을 지탱하지 못했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럼에도 엄 씨는 "몇 년 전부터 마약에 중독된 상태였고, 수억원에 달하는 마약값을 충당하느라 어쩔 수 없이 이 사건 범행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거짓말이었다. 재판부는 엄씨가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고, 피부관리를 받고 명품을 구매하는 등 사치 부리는 데 돈을 탕진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결국 법원은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범행의 동기, 방법과 결과, 범행 후의 정황에서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피고인의 반사회적인 악성, 피해자들과 그 유족들이 겪었거나 겪고 있는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의 정도를 고려하면 피고인을 영원히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형의 선고가 불가피하다"고 판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