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학개미 미국 증시行 가속…보름 새 13兆 늘어
정부 총력전에도 좀처럼 안 잡히는 원·달러 환율
국장 체질 개선 필요성…3차 상법개정·MSCI 선진지수 편입 주목
"세금 깎아준다고 해서 미국 주식 팔아볼까 했는데요. 계산기 두드려보니 그냥 그대로 가는 게 나을 것 같더라고요. 솔직히 환율도 더 오를 듯하고, 국내 주식보단 미국 주식이 더 상승할 것 같은데 굳이 돌아올 이유가 있나 싶어요."
정부가 해외 주식에 투자한 개인들을 국내로 불러들이기 위해 파격적인 세제 혜택까지 내걸었지만 정작 당사자들의 반응은 시큰둥합니다.
21일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지난 16일 기준 국내 투자자의 미국 주식 보관액은 1718억달러, 우리 돈으로 약 254조원에 달합니다. 지난해 말 1636억달러(약 241조원)였던 것과 비교하면 불과 보름 만에 13조원가량 늘어난 셈입니다.
더 주목할 것은 증가 속도입니다. 2022년 말 442억달러에 불과했던 미국 주식 보관액이 2023년 말 680억달러, 2024년 말 1121억달러로 불어났습니다. 올해 들어서만 국내 투자자의 미국 증시 순매수액은 32억4983만달러(약 4조8000억원)로 지난해 12월 한 달 순매수 규모(18억7384만달러·2조8000억원)를 훌쩍 넘어섰습니다. 코스피가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며 지난 19일 4900대를 돌파했는데도 개인투자자들의 시선은 여전히 미국 증시에 머물러 있는 겁니다.
◆政 총력 대응, 효과는 반짝…"서학개미 탓 말고 제대로 대책 내놔라"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정부입니다. 한국은행 집계 결과 지난해 1월부터 10월까지 거주자의 해외투자로 국내에서 빠져나간 외환 순유출 규모는 196억달러(약 29조원)로, 전년 동기 대비 무려 40배 가까이 급증했습니다.
정부는 지난해 말부터 가용한 모든 수단을 총동원했습니다. 외환당국과 국민연금은 연간 650억달러 규모의 외환스와프 계약을 1년 연장했고, 외환당국은 "정부의 강력한 의지와 정책 실행 능력을 곧 확인하게 될 것"이라며 경고장을 날렸습니다. 관세청은 지난 13일 수출기업 1138곳을 대상으로 외환 검사에 착수했고, 금융감독원은 증권사의 해외투자 관련 실태 점검에 나섰습니다.
당근책도 나왔습니다. '국내시장 복귀계좌(RIA)'를 도입해 해외 주식을 팔고 그 돈으로 국내 주식에 1년간 투자하면 매도금액 5000만원 한도 내에서 해외주식 양도소득세 20%를 면제해주기로 했습니다. 매도 시점에 따라 1분기 100%, 2분기 80%, 하반기 50%로 공제율을 차등 적용합니다.
이런 총력 대응에 지난해 말 원·달러 환율은 1439.0원으로 주춤했습니다. 하지만 새해 들어 10거래일 연속 상승세를 이어갔습니다.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의 "원화 약세가 한국의 펀더멘털과 맞지 않는다"는 이례적인 구두 개입성 발언까지 이어졌지만 일시적으로 낮아졌다 다시 오르기를 반복하는 양상입니다. 박상현 iM증권 연구원은 "정부 대책이 아직 뚜렷한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환율 문제를 두고 정치권에서도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이언주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은 지난 16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를 향해 "서학개미 등 남 탓을 할 것이 아니라 통화당국이 분명한 대책을 제시해야 한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는 "통화량 증가가 환율 상승 요인이 아니라며 '아무 문제 없다'는 식의 발언은 시장을 안심시키기는커녕 불안을 키운다"고 지적했습니다.
앞서 이창용 총재는 지난 15일 "한국은행이 돈을 많이 풀어 환율이 올랐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환율 상승 배경 중 하나로 청년층의 해외 투자 확대를 언급하기도 했는데, 이것이 서학개미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는 논란을 불러일으킨 겁니다.
전문가들은 정부 대책이 미봉책에 그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도 "일관된 정책 대응을 통해 경제주체의 신뢰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서학개미 발 돌릴 '핵심 키' 국장 체질 개선
증권업계도 정부 정책에 발맞춰 나섰습니다. 주요 증권사들은 수수료 면제와 주식 지급 등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서학개미 유치 경쟁에 뛰어들었습니다.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은 지난 13일 주요 증권사·자산운용사 최고경영자들을 소집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개별 종목의 레버리지 ETF 도입 등을 논의했습니다.
흥미로운 건 지난해 국내 주식 투자자의 수익률이 해외 주식 투자자보다 3배 높았다는 점입니다. NH투자증권 집계 결과 국내 주식 투자자(303만명)의 수익률은 34.44%로, 해외주식 투자자(85만명)의 10.10%를 크게 웃돌았습니다.
그럼에도 서학개미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건 결국 국내 증시에 대한 구조적 신뢰 부족 때문이라는 분석입니다.
정부도 이를 인식하고 새해 경제성장전략에서 MSCI 선진국지수 편입을 목표로 로드맵을 발표했습니다. 배당 확대, 자사주 소각, 지배구조 개선 등 밸류업 정책이 실질적 효과로 이어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습니다. 2월 임시국회를 앞두고 자사주 소각 의무화 내용을 담은 3차 상법 개정 움직임이 가시화되면서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에 대한 기대감도 확산하고 있습니다.
일각에선 이미 한국 주식시장이 구조적인 주주환원 시대로 진입했다는 진단도 나옵니다. 대신증권에 따르면 지난해 신규 발행된 유상증자와 전환사채(CB) 액수에서 소각된 자사주 액수를 뺀 수치인 주식 순공급액(코스피)은 3556억원 감소했는데요.
이경연 대신증권 연구원은 "과거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이었던 잦은 유상증자와 쪼개기 상장 등이 크게 줄어들면서 한국 증시의 밸류에이션(실적 대비 주가)이 올라가는 구간에 진입했다"고 분석했습니다.
국내 증시는 코스피 지수 5000시대를 목전에 뒀지만 지수만 오르고 개인 투자자들의 마음은 여전히 미국증시를 향해 있는데요. 당근과 채찍만으로는 서학개미의 발걸음을 되돌리기엔 부족하다는 것, 254조원이라는 숫자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국장(국내 증시) 역시 투자할 만한 곳이라는 신뢰를 되찾을 수 있도록 촘촘한 대책들이 현실화돼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