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령 바이올리니스트
나는 솔직히 말해 음악 콩쿠르 심사위원으로 앉는 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얼마 전에도 지역 음악 콩쿠르 심사를 맡았지만, 심사석에 앉는 순간부터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이유는 콩쿠르나 학생들에 대한 불신 때문이 아니라, 심사의 구조가 연주를 점수로 환산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음악을 온전히 듣는 일이 아니라, 연주를 숫자로 정리해야 한다는 부담이 늘 따른다. 준비 상태나 음악에 대한 이해, 앞으로의 가능성은 몇 마디 음만 들어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차이를 숫자로 고정하는 순간, 음악은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이 된다.
주최 측은 심사 전 늘 같은 말을 한다. "심사위원들 점수 차이가 어느 정도 나면 학부모들에게 항의가 들어옵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점수를 비슷하게 맞춰 달라고 한다. 하지만 이 말이 반복될수록 심사는 공정함보다 민원 관리에 가까워진다. 각자의 기준은 점점 흐려지고, 무난한 평균값이 가장 안전한 선택이 된다.
한 번은 유난히 눈에 띄는 학생을 만난 적이 있다. 기술을 넘어 음악적 감각과 재능이 분명히 느껴지는 연주였다. 내 기준에서는 망설일 이유가 없는 높은 점수였다. 그러나 옆에 앉은 중심 심사위원이 다른 판단을 내렸고, 점수 차이가 크면 곤란해진다는 걸 알기에 나 역시 점수를 낮췄다. 그날 이후로도 그 학생의 연주는 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리고 연주를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다는 미안함도 함께 남았다. 공정하지 않은 심사는 단순히 순위를 바꾸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 심사를 믿지 않게 되는 순간, 아이가 음악을 대하는 태도 역시 함께 흔들린다.
최근 심사에서는 또 다른 난감함을 느꼈다. 연주를 들으면서 동시에 심사평을 작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한 귀로는 연주를 듣고, 한 손으로는 문장을 써 내려가는 상황에서 음악을 온전히 집중해 듣기 어렵다. 이는 심사위원 개인의 성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연주가 끝난 뒤 심사평을 작성할 시간을 따로 주는 편이 오히려 더 공정할 것이다.
아무리 작은 지역 콩쿠르라 해도 심사는 공정해야 한다. 그 공정함은 개인의 양심이나 노력만으로 유지되기 어렵다. 점수를 즉시 제출하게 하거나, 심사위원 간 점수 사전 조율을 차단하고, 심사 기준을 명확히 문서화하는 최소한의 장치는 필요하다. 이런 기준은 개별 주최의 판단이 아니라, 지역 음악협회 차원에서 마련돼야 하지 않을까. 주최가 사단체라 하더라도, 대구에서 열리고 대구 학생들이 대부분 참가하는 콩쿠르라면 지역 사회와 완전히 무관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지역 음악협회 차원에서 공정한 심사를 위한 최소한의 기준을 마련할 수는 없을지 묻고 싶다.
콩쿠르의 의미는 결과가 아니라, 준비하는 시간과 무대에 오르는 과정, 그리고 그 경험이 아이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는가에 있다. 공정한 심사는 개인의 양심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제도가 기준을 만들고, 그 기준이 음악을 지켜줄 때, 콩쿠르는 비로소 교육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