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딸이야?'는 면박에 한평생 눈칫밥 먹어
친구들이 연필을 잡기 훨씬 전부터 호미를 손에 쥐어…가족들의 눈엔 '일꾼'으로 학교도 못 가
지난해 치매 판정으로 홀로 집 밖에 나서는 것도 어려워
"아…새해구나, 밖을 나가지 않아서 해가 바뀐 지도 몰랐어요."
얼음장처럼 차가운 좁은 방에서 그나마 온기가 도는 전기장판에 몸을 올린 김태자(81·가명) 씨가 입을 열었다. 태자 씨의 하루는 해가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았다. 올해도 누운 채로 신년을 맞았다. 시력을 잃고 치매까지 겹치면서 집 밖을 나서는 것은 공포가 됐다. 문을 나서는 순간 실종되거나 사고를 당하거나 둘 중 하나다.
최근에는 화장실을 가는 도중 낙상해 허리를 다쳤다. 꼿꼿이 서는 건 다음 생에서나 가능할 일이다. 몸을 옆으로 조금 틀다가도 이내 곧 천장을 바라봐야 한다.
"통증이 너무 심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어요. 대소변도 복지사가 와서 받아주는 제 자신이 너무 싫어요."
수술이라도 해서 시력이 괜찮아지면 모를까. 태자 씨의 눈은 더 이상 손 쓸 방법이 없다. 'TV 화면이 검게 꺼지듯, 그 순간이 올 겁니다'는 의사의 말을 잊지 못한다. 눈을 떠도 어두움만이 가득할 그날을 조금이라도 미루고자 보이지도 않는 안약을 손끝 감각으로 떨어뜨렸다.
◆연필 대신 호미를 쥐었던 아이
친구들이 연필을 잡기도 훨씬 전에, 태자 씨는 호미부터 손에 쥐었다. 예천에서 고지식한 부모 아래 태어난 그는 가족의 눈엔 그저 '일꾼'이었다. 딸이라는 이유로 학교 문턱은 넘지못했다. 아버지는 입학 통지서를 숨겼다.
5살 무렵부터 무를 캐고 배추를 뽑았다. 산도 곧잘 올라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들까지 누비며 나물을 뜯었다.
배움의 한은 컸다. 밭 일을 하다가도 가족들의 눈을 피해 학교로 건너갔다.
"교실 창문 옆이 제 자리였어요. 선생님 목소리를 하나라도 더 듣고, 칠판의 글씨를 눈에 붙잡아 두는 일이 배움의 전부였어요."
결혼도 스스로 선택한 일이 아니었다. 살림꾼으로 소문난 태자 씨를 유심히 지켜보던 동네 어른이 아들을 소개했다. 군 복무 중이던 남편의 휴가에 맞춰 결혼했다. 전역할 때까지 홀로 집을 지켰다.
두 딸을 낳은 태자 씨는 남편과 단란한 가정을 꾸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시부모들의 '왜 아들을 낳지 못하냐'는 면박에 단 꿈은 깨졌다.
남편과 아들을 가져보려고 노력했지만 좀처럼 임신이 되지 않았다. 눈치가 너무 보여 식사도 따로 해야 했다.
살림살이가 순탄치 않은 상황에서 결국 셋째를 품었지만 '또 딸이야?'는 말에 태자 씨는 시부모를 피해 다녔다.
삼신할매부터 신기가 있다는 점집으로 향해 아들을 낳을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하겠다고 빌고 빌었다. 간절함 끝에 드디어 넷째가 아들로 태어났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너무 애쓴 탓일까. 극심한 스트레스에 몸은 성한 데가 없었고 마음에는 화병이 생기기 시작했다. '너는 여자도 아니야'라는 모진 말에 감정 기복과 우울감은 잠시도 떠나지 않았고 일상 전반을 서서히 잠식해 갔다.
여자로서 존중받지 못했던 삶에서 가장 노릇도 해야 했다. 가족과 함께 대구로 건너온 태자 씨는 헌책방을 운영했다. 배움이 짧아 글을 읽지는 못했지만, 수백 권에 달하는 책의 표지와 책장 위치를 외워 손님들을 응대했다.
장사는 오래가지 못했다. 인근 서점들은 학생들에게 직접 물어가며 새 교과서와 참고서를 제때 들여놓았다. 학교를 다녀본 적이 없었던 태자 씨는 서점간 경쟁에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기억과 시력이 함께 무너진 노년
한평생 배움의 한스러움과 여자로서의 모멸감을 느꼈던 탓일까. 책방의 셔터를 내린 뒤 찾아온 손님이라곤 질병뿐이었다.
40년 가까이 머리가 지끈거려 바늘로 피를 내 통증을 줄여왔던 것이 치매의 전조증상일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가스레인지 위에 냄비를 올려야 하는데 소쿠리를 올렸던 거예요. 타는 냄새가 나고서야 머리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됐어요."
태자 씨는 2024년 치매 판정을 받았다. 뇌에는 석회가 잔뜩 껴 크기가 줄어들었고 중증 판정을 받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행복했던 기억은 잊혀져 간다. 생에서 처음 마주한 자식인 큰 딸의 이름을 떠올리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걸린다. 아침밥을 먹어도 이내 곧 '식사는 언제 하느냐'고 묻는 것도 일상이 됐다.
15년 전에는 위암 수술을 거치면서 몸이 더욱 쇠약해진 상태다. 회복 과정에서도 장기가 봉합되지 않아 재수술도 수번 했다.
한스러움과 억울함을 안고 살아온 태자 씨가 여든을 넘긴 지금 바라는 건 하나뿐이다. 혼자 힘으로 집을 나설 수는 없지만, 1층에 비어 있는 방을 고쳐 휠체어를 타고 바깥 공기를 마셔보는 것이다. 현재는 2층에서 생활하고 있어 외출하려면 계단을 지나야 하고, 자식들이 모두 나서야 한다.
"1층에서 지낼 수만 있다면 한 명의 도움만으로 대문을 나설 수 있어요. 한이 많은 제 삶에 조금이나마 숨통을 틔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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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성금내역]
◆안동 산불 피해 88세 김 씨 부부에 2,243만원 전달
지난 3월 경북 북부권 대형 산불로 삶의 터전을 모두 잃고 걷기도 힘든 몸으로 병마와 싸우고 있는 88세 김모 씨 부부(매일신문 12월 23일 11면 보도)에게 2천243만468원을 전달했습니다.
이 성금엔 ▷하혜련 5만원 ▷여환주 4만원 ▷이강준 3만원 ▷이병규 2만5천원 ▷신종욱 2만원 ▷안태성 1만5천원 ▷배상영 1만원 ▷류시배 5천원 ▷문민성 4천원 ▷이장윤 4천원이 더해졌습니다. 성금을 보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만성 편두통·혈액암 투병 길소정 씨에 2,374만원 성금
만성 편두통에 최근 혈액암 확진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인 길소정 씨(매일신문 12월 30일 12면 보도)에게 42개 단체, 105명의 독자가 2천374만3천777원을 보내주셨습니다. 성금을 보내주신 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상서고등학교 423만3천원 ▷에스엘㈜ 200만원 ▷피에이치씨큰나무복지재단 200만원 ▷건화문화장학재단 150만원 ▷㈜일지테크 100만원 ▷㈜태원전기 100만원 ▷한성철강㈜ 100만원 ▷신라공업 50만원 ▷한라하우젠트 50만원 ▷최상규이비인후과 40만원 ▷㈜태린(배민경) 40만원 ▷㈜신행건설(정영화) 30만원 ▷삼성기공(장태종) 30만원 ▷㈜동아티오엘 25만원 ▷㈜백년가게국제의료기 25만원 ▷금강엘이디제작소(신철범) 20만원 ▷대창공업사 20만원 ▷대흥분쇄기(한미숙) 20만원 ▷변호사박헌경사무소 20만원 ▷경주천마운전전문학원 10만원 ▷㈜구마이엔씨(임창길) 10만원 ▷김영준치과의원 10만원 ▷동양자동차운전전문학원 10만원 ▷세움종합건설(조득환) 10만원 ▷신성산업㈜ 10만원 ▷유성에스에이치(이석현) 10만원 ▷㈜우주배관종합상사(김태룡) 10만원 ▷창성정공(허만우) 10만원 ▷김용근(국제정밀) 5만원 ▷느티나무한약국 5만원 ▷동산내과(박경아) 5만원 ▷동산내과(박준석) 5만원 ▷베드로안경원 5만원 ▷선진건설㈜(류시장) 5만원 ▷세무사박장덕사무소 5만원 ▷전피부과의원(전의식) 5만원 ▷칠곡한빛치과의원(김형섭) 5만원 ▷㈜동위(이석우) 3만원 ▷매일신문구미형곡지국(방일철) 3만원 ▷토탈인쇄(김창근) 3만원 ▷통영굴국밥국수(허정) 2만원 ▷하나회(김미라) 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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