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령 바이올리니스트
익숙한 일상에서 잠시 떨어져 나와 있으면, 평소에는 잘 들리지 않던 질문들이 따라온다. 바쁜 일정 속에서는 굳이 꺼내지 않아도 되었던 생각들이다. 멀리 와서야, 거리보다 삶의 속도가 달라졌다는 점이 더 크게 느껴졌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내 몸과 마음이었다. 해야 할 일에 쫓기다 보니 건강을 뒤로 미룬 순간들이 적지 않았다. 늘 열심히 살고 있다고 믿었지만, 그 '열심히'가 과연 나를 위한 것이었는지는 다시 묻게 됐다. 바쁘다는 이유는 많은 것을 정당화하지만, 결국 스스로를 설득하지는 못한다. 열심히 살았다는 말과, 잘 살았다는 말은 종종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오래 해온 일에 대해서도 생각이 이어졌다. 같은 일을 지속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축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관성이 되기 쉽다. 같은 일을 오래 해온 사람일수록, 어느 순간 기술보다 태도가 더 중요해진다. 음악이든 삶이든 마찬가지다. 무대에 서기 전, 연주할 곡을 정말 내 것으로 소화했는지, 마음 없이 반복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앞으로는 서두르기보다, 음악을 더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분히 준비된 상태에서 무대에 서고 싶다는 다짐이 생겼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조용히 떠올려 봤다. 새롭게 가까워진 인연이 있는가 하면, 예전만큼 자주 닿지 않게 된 관계도 있다. 모든 관계를 같은 힘으로 유지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이제는 받아들이게 된다. 멀어짐이 꼭 잘못은 아니고, 변화가 반드시 실패를 뜻하는 것도 아니다.
일상의 루틴 역시 점검 대상이었다. 하루의 흐름이 나와 가족의 행복과 건강을 향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익숙함에 기대어 무심히 흘려보내고 있었는지.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마저 다른 생각으로 채우고 있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된다. 함께 있을 때만큼은 온전히 그 시간에 머무는 삶, 그것 역시 의식적인 선택이 필요하다.
책을 읽는 일에 대해서도 마음을 다잡게 된다. 바쁘다는 이유로 미뤄왔던 독서는 생각보다 쉽게 삶의 중심에서 밀려나 있었다. 읽는다는 것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생각의 속도를 가다듬고 자신을 점검하는 시간이라는 걸 다시 기억하고 싶다.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거창한 결심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무엇을 더할지보다, 무엇을 덜어낼지를 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끝내지 않은 생각들, 점검하지 않은 방식들을 그대로 둔 채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는 없다. 잠시 멈춰 서서 지금까지의 문장을 다시 읽어보는 시간은 뒤처짐이 아니라 준비에 가깝다.
다시 익숙한 자리로 돌아가면 삶은 또 같은 속도로 흘러갈 것이다. 그러나 이전과는 조금 다른 마음으로 그 시간을 건너고 싶다. 더 사랑하는 마음으로 음악을 대하고, 충분히 준비된 연주로 무대에 서며, 책을 통해 생각의 깊이를 놓치지 않고, 아이와 함께하는 순간만큼은 온전히 그 시간에 집중하는 삶.
다음 장을 넘기기 전에 필요한 것은 거창한 변화가 아니라, 나를 아끼는 선택을 하루에 하나씩 늘려가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조금씩, 삶의 결을 더 따뜻한 쪽으로 옮겨가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