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빵을 생각하며 비오는 지난 주말 동성로를 걸었다. 공룡같이 성장했던 1950~70년대 빵집들은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고작 남은 건 최가네케이크, 삼송 베이커리, 밀밭베이커리 정도였다. 하지만 사라진 건 아니었다. 새로운 세상에 걸맞는 모습으로 추억의 빵집이 모던하게 진화를 했다. 동서로 같은 '동성당'도 보였다.
단팥빵은 호떡과 찰떡을 호령하고 그리고 골목표 찐빵과 붕어빵을 양산시켰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빵 하나가 또 있다. 한국 빵의 금자탑으로 평가받았던 '경주황남빵'. 최근 시진핑이 '엄지척' 해서 화제가 됐는데 한동안 '천안호두과자'는 물론 대전의 '성심당', 군산의 '이성당'도 대적하기 힘들었다. 1939년 창업자 최영화(1917~1995)가 만든 황남빵은 이후 '황남빵'과 '최영화빵'으로 양분되고 이어 창업주의 수제자로 불리는 이상복이 독립해 만든 '경주빵'(찰보리빵)으로 분파된다. 게다가 황리단길 '동전빵'까지 가세하면서 경주는 '빵빵시티'로 발돋움했다.
◆단팥빵의 기원
단팥빵은 일본에서 건너왔다. 메이지 일왕 시절 왕실 주방 조리사였던 기무라 야스베. 그는 독립해 도쿄 직업훈련소에 취직을 한다. 그곳에서 네덜란드인의 조리사로 일했던 우메치키라는 사람을 만나 서양빵의 비밀을 전수하게 된다. 기무라는 일본 찐빵도 아니고 중국 만두도 아닌, 서양식 빵과도 다른 신개념 단팥빵을 개발한다. 기무라는 개발자인 우메키치와 1869년 도쿄에 서양식 제과점을 창업한다. 이 빵집이 도쿄의 첫 제과점이다. 하지만 1873년 화재로 전소된다. 기무라는 아들과 함께 이듬해 긴자에서 '기무라야'(木村屋)를 오픈한다. 일본 최초 단팥빵 가게였다.
단팥빵 위 참깨는 무슨 의미인가. 내용물을 암시한다. 단팥도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팥 알갱이가 씹힐 수 있도록 팥을 체로 거르지 않고 통단팥을 넣은 것, 또 다른 건 팥을 체로 걸러서 앙금을 가라앉힌 고운 팥빵이었다. 통단팥은 겨자씨, 팥앙금은 참깨를 뿌렸다.
일왕 때문에 대중화된다. 일왕이 벚꽃놀이 행차를 하는데 기무라의 단팥빵을 원했다. 기무라는 감격했다. 그는 일본풍이 감돌도록 소금에 절인 벚나무 열매를 빵 복판에 눌러 얹었다. 현재 단팥빵의 중심부가 조금 내려앉은 이유다. 1875년 4월 메일지 일왕의 식탁에 기무라의 단팥빵이 올라간다. 기무라는 궁중에 자기 빵을 계속 공급할 수 있었다. 매년 4월 4일은 일본의 단팥빵의 날.
◆1950~60년대 대구의 대표 빵집
1950년대 중부경찰서 네거리 일대는 '빵거리'로 군림한다. 삼미·삼송·송영사·수형당을 필두로 옛 대구극장 초입 고려당, 중부경찰서 바로 북측에 일성당(사장 김도권), 바로 옆에 동양당, 종로초등 정문 맞은편에 덕인당, 대구역 앞 대우센터 뒤편에 구일제과점(박태준), 동성로 미도방 맞은편에 풍년당, 종로초등 근처에 풍곡당(사장 이을수), 약전골목 동문 근처엔 백일당, 학원서림 부근에는 맘모스 등이 나타난다.
특히 구일제과는 건과자 전문점으로 유명했다. 60년대를 화려하게 물들인 맘모스의 기술은 뉴욕을 거쳐 뉴델로 이어져 70~80년대 대구를 빵의 도시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 훗날 그 기술력은 안동으로 건너가 안동 맘모스제과점을 잉태하기에 이른다. 그만큼 기술이 출중했다. 맘모스는 대구에선 처음으로 즉석 도넛과 고로케를 유행시켰다. 이 무렵 잘 나가는 7개 제과점 주인들이 모여 '7인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일본 연수까지 다녀오면서 일본의 선진 제빵 기술을 가져왔고, 이 모임은 90년대 뉴델제과 사장 최종수씨가 주축이 된 '과우회'(菓友會)'로 발전한다. 삼미제과사 최팔용 사장, 삼송빵집 서모 사장, 송영사 사장, 고려당 하경봉 사장, 수형당 진병수 사장, 이들은 모두 북성로 일본 빵집 이마사카 출신이었고 다들 유도 유단자였다.
삼미제과사는 삼덕동 대구형무소(1910년 대구감옥으로 출발해 23년 대구형무소, 61년 대구교도소로 개칭한 뒤 71년 6월1일 화원으로 이전) 정문 바로 근처에 있어 수형자들에겐 잊지 못할 추억의 빵집이 된다. 바람 불면 빵 굽는 냄새가 형무소 담 안으로 들어갔다. 재소자들은 '냄새와의 싸움'을 벌여야 했다. 최 사장은 50년대 초 수형당보다 앞서 군에 빵을 납품하기도 했지만 친구인 진 사장의 사업 수완을 이겨내지 못하고 57년쯤 좌초되고 만다. 현재 아카데미 옆 골목 안에 자릴 잡고 있는 최가네 케이크 사장 최무갑이 그의 아들이다.
◆마약빵 삼송빵집
현재 중구 동성로 3가 옛 제일극장 맞은편 삼송베이커리는 광복 직후 서 모 사장이 동산약국 옆에 세운 삼송빵집의 상호를 계승했다. 지금은 하나밖에 없지만 예전에는 변두리에 같은 상호가 여러 개 있었다. 삼송이 그만큼 유명한 탓이다. 삼송의 주인은 10여번 바뀐다. 중구 공평동 스텔라 베이커리 김호상 사장, 옛 송죽극장 옆 뉴델제과 최종수 사장도 삼송 간판을 걸기도 했다.
삼송은 60년대 중반 대형화재를 당한다. 그로 인해 동산약국과 삼송빵집이 동시에 피해를 입는다. 이 화재는 73년 6월6일 송죽극장 옆 뉴델제과 화재와 함께 대구의 대표적 빵집 화재로 기록된다. 삼송은 신축된 뒤 종업원이 한번 맡았다가 73년쯤 역시 삼송의 기술자였던 박명호·정옥희 부부한테 넘어온다. 이들이 삼송의 마지막 사장이 된다. 70년대까지 전성기를 구가했던 대신동 상권은 80년대로 접어들면서 급속도로 추락하게 된다. 바로 서문시장 상권이 쇠락한 것이다. 박 사장은 '탈(脫)대신동'을 결심하고 87년 2월 제일극장 맞은편으로 이전한다. 하지만 장사가 별로였다. 대구도시철도 1호선 공사, 그리고 파리바게트의 공세로 일락서산을 신세로 저물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삼송에 대반전이 일어난다. 바로 '마약빵(옥수수크로켓) 신드롬'이 발생한 것이다. 그건 그의 절친인 시내 밀밭베이커리의 이정부 대표가 기존 야채크로켓인 '크래존'을 제안했고 그걸 삼송이 기회의 발판으로 삼은 것이다. 아무튼, 제빵업계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빛나는 우정이었다.
◆뉴욕·뉴델·런던
50~60년대 빵집들은 결국 맘모스한테 무릎을 꿇고 만다. 하지만 맘모스의 신기술을 눈여겨 본 사람이 있었다. 바로 뉴욕과 뉴델 사장이었다. 50년대 4인방 제빵인이 있었듯 70년대에도 대구제빵계를 주름잡던 3인방이 있었다. 뉴욕의 강신영과 이점석 사장, 뉴델의 최종수, 런던의 조원길이었다. 이들로 인해 대구가 비로소 제빵도시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섬유경기는 호황이었고 패스트푸드가 대구에 본격 상륙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과점은 호황을 누릴 수밖에 없었다.
교동시장 초입 오른쪽 모퉁이 보래옥을 인수한 강신영은 '뉴욕제과'로 상호를 바꾼다. 훗날 한일극장 근처로 이전해 대구 최고의 제과점으로 성공시킨다. 강 사장은 70년대 대구 상권이 남동진한다는 사실을 알고 한일극장 근처로 자릴 옮긴다. 그는 직원 복이 많았다. 대구에선 처음으로 '모닝식빵'을 개발한 중구 포정동 풍차베이커리 사장 권영오, 수성구 시지에서 뉴욕제과를 경영했던 김정환, 고려당 베이커리 강대건 등이 그곳을 거쳐갔다. 뉴욕은 역시 '사라다빵'이었다. 일반 집과는 달리 뉴욕은 감자를 깍두기처럼 썰어 찬물에 4~5시간 담가둔 뒤 삶아 아린 맛을 없앴다. 포장 빵이 귀했는데 뉴욕은 낱개 포장 시스템을 도입한다. 한창 때는 한강 이남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번 제과점이 된다. 하지만 집안 사정으로 뉴욕은 도중하차, 옛 동원예식장 지하 동원제과점을 운영한 상주 출신의 이점석(전 대구경북제과협회 지회장)이 뉴욕을 인수해 더욱 발전시킨다. 뉴욕은 경비행기를 동원해 시가 전역에 전단을 뿌렸다. 개점일과 생일이 일치하는 손님에게 케이크를 무료로 제공한다는 광고문구까지 삽입했다.
뉴욕의 아성에 도전한 게 바로 옛 송죽극장 동편에 있었던 '뉴델제과'. 교동시장 입구 맞은편 동성로변에 자리 잡고 있어 초창기 뉴욕처럼 장사가 잘 됐다. 뉴델의 최종수 사장은 처음엔 과자 도매점도 하면서 기반을 다진다. 최 사장은 원래 수형당 기술자 출신으로 처음엔 대신동 삼송빵집을 운영하다가 뉴델제과를 만들어 성공한다. 이땐 백화점에선 빵을 팔지 않았다. 상품권 개념도 생겨나지 않았다. 가장 인기 있는 건 버터로 만든 케이크와 롤케이크류가 선물용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뉴델은 무려 1만여 개를 철야작업을 통해 만들어냈다. 크리스마스 한 달 전부터 작업을 시작해야 했다. 지금은 아무도 안 먹지만 그땐 버터로 만든 꽃잎을 만들어 꽂아놓기도 했다. 요즘 백화점 제빵 코너 판매 스타일이 이때 등장한다. 최 사장은 런던제과와 뉴욕제과 사이에서 고사 직전이던 킹뉴델을 황제당으로 상호를 바꾸어 런던과 팽팽한 접전을 펼친다. 황제당 '즉석 제빵 시스템'은 이후 전국적으로 선풍을 일으켰고 후에 지역 제빵사들은 너도 나도 그 모델을 도입하게 된다.
70년대초 동성로 동아백화점 네거리 근처에 있었던 옛 원호청 자리에 또 하나의 무시무시한 저력을 가진 제과점이 들어온다. 바로 '런던제과'였다. 규모도 뉴욕보다 더 컸다. 특히 하절기엔 얼음 빙설이 강했다. 삶은 팥, 프루츠와 수박을 얹었다. 뉴델 최 사장은 비록 친구간이긴 하지만 런던의 등장에 초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엔 제과점 허가가 무척 까다로웠다. 그만큼 진입장벽이 높았던 것이다. 런던은 번번이 시설 미비로 중구청 위생과로부터 영업허가를 받지 못한다. 어렵게 개점한 조원길 사장에게 호재가 안겨진다. 런던이 개업하고 1년 남짓 지난 뒤 바로 경쟁업소 뉴델이 전소된 것이다. 그 덕분에 런던은 한때 미도백화점 1년 매출에 버금갈 정도로 고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1983년 대구빵의 침몰의 해
하지만 뉴욕·뉴델·런던은 전두환 정권하였던 1983년쯤 갑자기 사라진다. 그건 지역 제빵인들에겐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3인방은 나름대로 부동산 자본을 확보하고 있었고, 또한 제빵 영업이 갈수록 마진율이 줄어든다는 걸 알고 있었다. 부가가치세(77년 도입)로 인해 수익률까지 날로 감소하고 있었다. 설상가상 방위성금 명목으로 정치자금 제공 압력도 측면에서 받고 있었다. 각종 패스트푸드가 대구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제빵산업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걸 안 것이다. 또한 지역자본가로 성장한 그들을 겨냥한 정부 당국의 정치적 압력도 달갑지 않았다. 돈을 벌어도 그렇게 맘이 편하지 못했다. 제빵 사업다각화를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이들은 지쳐 있었다. 설상가상 장남들도 하나 같이 공부에만 열중했고, 사장들도 장남에게 빵집을 물려줄 맘이 없었다. 3인방은 그런 연유로 86아시안게임·88서울올림픽 특수를 누려보지도 못하고 한꺼번에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