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었는지 확인해줘요"…집 비밀번호 공유하는 아파트 주민들

입력 2025-12-06 16:00:11 수정 2025-12-06 16: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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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고립보고서] 3편 웬만해선 이 단지를 벗어날 수 없다
달서구 월성2동·상인3동…영구임대아파트에 고립 가구 밀집
고립 기간 길고 폐쇄적 생활권 특징…'만성 고립' 발현

대구 달서구 월성주공2단지 주민 배수관(82) 씨가 고립된 이웃들을 찾아가고 있다. 그는 몇 년 전부터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돕기 위해 이웃들의 안부를 확인하고 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대구 달서구 월성주공2단지 주민 배수관(82) 씨가 고립된 이웃들을 찾아가고 있다. 그는 몇 년 전부터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돕기 위해 이웃들의 안부를 확인하고 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박정열 씨의 집을 방문한 수관 씨가 밥상을 차리고 있다. 정열 씨는 이혼을 할 때 자녀들을 불러 돈을 나눠주고는 작별을 했다. 아빠가 힘들게 사는 모습은 보여주기 싫다는 이유에서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대구 달서구 월성2동 월성주공2단지의 놀이터는 평일 대낮에도 사람들이 모인다. 놀이터를 채운 건 아이들이 아니라 70~80대 노인들이다. 몇몇은 벤치에 앉아 햇볕을 쬐고, 다른 이들은 보행기를 밀며 천천히 같은 길을 돈다.

15층짜리 복도형 아파트의 하얀 외벽은 세월에 씻겨 곳곳이 누렇게 바랬다. 엘리베이터 문 옆에는 '정신건강 상담'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몇 층을 올라가면 복도 끝에 배수관(82) 씨의 집이 있다. 현관 앞에는 플라스틱 대야와 병, 헌 옷가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혹시 필요할 사람이 있으면 주려고 모은 거예요. 들어와요."

수관 씨의 집은 모기향 냄새로 매캐하다. 하루 종일 향을 피워야 이웃집에서 넘어오는 바퀴벌레를 막을 수 있다. 몸과 옷에 연기가 배지만 별다른 수가 없다. 영구임대아파트에는 고립된 집이 많고, 해충은 고립된 집을 좋아한다. 옆집 박정열(59) 씨도 그런 환경에서 산다. 그는 일주일 내내 집 안에 틀어박힌 적도 많다.

수관 씨는 그를 이해했다. 이 아파트에 갓 입주했을 때 행정복지센터에 전화를 걸어 "내가 혼자 죽어버리면 냄새가 나지 않겠냐"며 안부 확인을 부탁하기도 했었던 그였다. 지금은 본인이 굳게 닫힌 문들을 하나씩 두드리며 이웃의 안부를 확인한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돕고 싶어서다. 몇 년 전 박 씨와 신재광(54) 씨는 "내가 죽었는지 확인해 달라"며 그에게 집 비밀번호를 알려줬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처음엔 안색이 거무죽죽했는데…."

◆"외롭다고 생각하면 죽는 수밖에 없다"…수관 씨가 돌보는 이웃들

1991년 들어선 월성주공2단지 아파트는 IMF 이후 도시 영세민들에게 '꿈의 아파트'로 불리며 각광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고령자와 독거 세대가 압도적 비율을 차지하는 고립의 상징으로 남았다. 수관 씨는 고립된 이웃을 찾아가 말을 걸고, 가끔 반찬을 해준다. 옆집 정열 씨와 윗집 재광 씨를 찾는 사람은 수관 씨와 단지의 복지사 뿐이다. 수관 씨가 몇 해 전까지 돌봤던 50대 박모 씨는 술과 도박을 놓지 못하다가 올 여름 홀로 세상을 떠났다. "여름은 특히 더 위험한 계절이에요. 가뜩이나 안 나오던 사람들이 더 안 나오거든."

"이모, 오셨어예." 몸이 불편한 정열 씨는 누운 채로 수관 씨를 맞았다. "내가 지금은 이래도, 진짜 열심히 살았어요. 정말로요."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고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자란 정열 씨가 붙든 생계의 끈은 '짜장면'이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중국집에 들어가 배달과 설거지를 했다. 어린 나이에 하루 15시간을 일하며 어깨 너머로 주방장의 기술을 배웠다. 20대 초반에 반점을 차린 뒤로는 잠을 줄여가며 살았다. 하루 네 시간도 채 못 잘 만큼 가게에 매달렸다.

지금은 오랜 우울증과 질병으로 지쳤다고 했다. 14년 전, 아내의 외도로 이혼하면서 그의 인생은 빠르게 추락했다. 자녀들에게는 그간 모은 돈을 모두 나눠주고 "힘들더라도 오래 살아라"라 작별했다. 아빠가 힘들게 사는 모습은 보여주기 싫었다.

가족도, 친구도 모두 떠나갔지만 외롭다는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나처럼 우울증이 깊은 사람은요, 자꾸 외롭다고 생각하면 죽는 수밖에 없어요."

이춘덕(72) 씨는 십여 년 전 시신·장기 기증 희망 등록을 했다. 자신의 시신이 쓸모가 있다면 죽더라도 누군가 찾아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박정열 씨의 집을 방문한 수관 씨가 밥상을 차리고 있다. 정열 씨는 이혼을 할 때 자녀들을 불러 돈을 나눠주고는 작별을 했다. 아빠가 힘들게 사는 모습은 보여주기 싫다는 이유에서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윗집 재광 씨는 젊은 시절을 술에 기대어 보냈다. 가족과는 오래 전에 멀어졌다. 그는 "내 인생을 망친 건 술이 아니라 외로움"이라고 했다. 외로우니 술만 마셨고, 술만 마시니 사람들이 떠나갔다. 지금은 술을 끊었지만 사람도 건강도 되돌아오지는 않았다.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은 없어요." 올해 3월엔 폐결핵에 걸려 몸무게가 20kg 넘게 빠졌다. "그래도 '내가 죽었는지 들여다봐줄 사람이 한 명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무이(수관 씨)가 이렇게 들여다 봐주니 고맙죠." 재광 씨는 마른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저 아저씨들과 똑같은 입장이에요." 수관 씨에게도 고립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남편은 30대 중반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식당을 하며 키운 두 아들은 오래 전에 독립했다. 가족을 볼 수 있는 날은 일 년에 몇 자녀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따로 찾지 않는다. 그는 "세상과 작별할 준비"를 하고 있다. 납골당 자리까지 마련해뒀다. 마지막을 정리하는 글을 쓰려다 눈물이 나 그만둔 적도 있다. 그날이 오면 집을 치우는 데 쓸 돈도 남겨 뒀다. "그래도 혼자 죽지 않기만 바란다"는 게 수관 씨의 마지막 바람이다.

◆"시체라도 쓸모 있으면 찾아줄까요"…시신·장기기증 신청한 춘덕 씨

수관 씨의 사례는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지극히 보기 드문 연대다. 대부분의 고립 가구는 작은 안부조차 기대하지 못한다. 상인3동 비둘기아파트는 그러한 현실을 압축적으로 보여줬다. 이곳은 오랫동안 사회적 낙인이 따라붙은 곳이다. 1992년 지어진 이곳은 영구임대아파트 중에서도 고령화와 슬럼화가 심각한 수준으로 꼽힌다.

이 아파트에는 장기준(67·가명) 씨처럼 아픈 과거를 감춘 인물도 산다. 그는 15년 전 큰 딸이 교제살인을 당한 뒤로 마음의 문을 닫았다. 하나 남은 혈육인 작은 딸과는 사실상 연락이 끊겼다. 기준 씨는 창문에 종이를 덕지덕지 발라놨다. 자신이 햇볕을 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건 후 십수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자책감에 시달리며 하루를 견딘다.

월성주공2단지아파트에 사는 한 저장강박세대의 집. 입구부터 쓰레기가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차있다. 신중언 기자
이춘덕(72) 씨는 십여 년 전 시신·장기 기증 희망 등록을 했다. 자신의 시신이 쓸모가 있다면 죽더라도 누군가 찾아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비둘기아파트 인근에서 사는 이춘덕(72) 씨는 매일 밤 창문을 조금 열어둔다. 밤새 죽더라도 너무 오래 방치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올해 봄에도 이웃 집에 살던 또래 남성이 홀로 죽었다고 했다. "경찰들이 몰려 있길래 '아, 누가 또 혼자 죽었구나' 했죠."

춘덕 씨는 IMF 당시 아내가 도망간 뒤 쭉 혼자 살았다. 아들이 있지만 이혼 이후 처형에게 입양돼 미국으로 갔다. 꽤 오랫동안 방황했지만, 지금은 수필을 쓰거나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낸다. 최근엔 상담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하루를 바쁘게 보내는 건 외로움과 불안감을 덜어내는 데 도움이 됐다. "그래도 고독으로부터 자유롭다 하는 건 거짓말이죠." 춘덕 씨는 십여 년 전 시신·장기기증을 등록했다. "내 시체가 쓸모가 있으면, 찾아줄 사람이 있지 않겠어요?"

◆웬만해선 이 단지를 벗어날 수 없다⋯영구임대아파트의 '만성 고립'

영구임대아파트는 기초생활수급자, 장애인, 만성질환자 등 사회적 취약계층의 집적지다. 입주 사유 자체가 장기적인 취약성을 전제하므로 고립 기간이 길며 폐쇄적 생활권을 형성하기 쉽다. 이런 환경은 주민들을 서서히 '만성 고립'으로 이끌었다.

비둘기아파트는 전체 2천827세대 중 독거 노인이 47%, 기초생활수급세대는 76%로 압도적인 비중을 보였다. 월성주공2단지아파트(2천364세대) 역시 1인 가구 독거노인은 44.3%, 기초생활수급 세대는 70.1%로 상당히 높았다. 이런 비율은 단지의 주거 구조가 취약계층을 한곳에 몰아넣은 결과다. 노인 빈곤과 독거의 결합은 외부와의 연결을 더 어렵게 만들며, 고립을 고착시킨다. 실제로 이 두 단지가 속한 상인3동과 월성2동의 인구 천명당 고독사 위험군 수는 각각 25.3명·23.5명으로, 대구 행정동 평균(5.2명)의 5배에 달한다.

만성화된 고립은 심각한 저장강박증을 야기하기도 한다. 지난해 두 아파트 단지에서는 저장강박 세대에 대한 청소 지원이 22건 진행됐다. 올해는 27건으로 늘었다. 저장강박으로 의심되는 세대는 그보다 훨씬 많지만, 외부와의 소통을 극도로 꺼리기 때문에 지자체나 복지관은 접근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월성주공2단지아파트에 사는 한 저장강박세대의 집. 입구부터 쓰레기가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차있다. 신중언 기자

단지 안 복지시설 덕에 복지 개입 빈도는 높지만, 관계와 서비스가 한정된 공간 안에 과밀해지며 오히려 폐쇄적 생활권을 굳히는 작용을 하기도 했다. 북구 산격주공아파트에서 만난 정경은(78·가명) 씨는 "복지관에서 주는 점심을 먹은 뒤엔 주로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낸다. 복지사들이 가끔 반찬도 주고, 안부도 물어봐준다"라며 "다만 찾아주는 사람이 없으니 아파트 단지 밖에 나갈 일이 거의 없다"라고 말했다.

단지 밖 사람들의 차별과 배제도 고립을 강화한다. 입주민들은 영구임대아파트에 산다는 사실에 위축되고, 이를 숨기기도 한다. 비둘기아파트 30년차 조수연(79) 씨는 "예전보다 인식이 나아졌다지만, 여전히 어디 사느냐는 질문에 얼버무리는 사람이 많다. 버스를 타면 아파트 정류장에서 내리지 않고 한 정거장 뒤나 앞에서 내리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이러한 특성들은 영구임대아파트 주민으로 하여금 '만성 고립'에 빠지게 할 위험성을 높인다. '만성 고립'은 장기간 지속된 독거와 빈곤, 관계망의 약화가 맞물려 사회적 고립이 고착된 상태를 말한다.

설문조사에서도 이런 특성이 드러났다. 영구임대아파트 거주 고립 가구 12명 중 10명(83%)이 10년 이상 독거했고, 평균 독거 기간은 19.2년이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복지사를 꼽은 이가 4명(33%)으로 가장 많았다. 폐쇄적 생활권을 형성한 이들에겐 복지사가 유일한 사회적 연결 고리였다.

그러나 복지 인력의 한계는 뚜렷하다. 복지사 1명이 평균 200세대를 전담하는 구조라 세심한 관리는 어렵다. 월성주공2단지를 담당하는 한 복지사는 "이 아파트에 10년 이상 거주해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분들도 많다. 인력의 한계로 이런 분들을 세심하게 살피는 것이 쉽지 않은 실정"이라고 말했다.

6년간 영구임대아파트에서 근무한 고한용 복지사는 "실제 현장에선 고독사가 발생해도 고인의 사연조차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라며 "현재로서는 단순한 물품 지원, 안부 확인에 치중하는 게 전부다. 고독사 예방이 아니라 고독사 확인 사업에 가깝다"고 밝혔다.

※이 기사는 대구보건대의 연구지원과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의 기획지원을 받아 작성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