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학대 피해 고립택한 혜지씨…1만명의 혜지들, 대구 '여기'에 숨었다 [대구고립보고서]

입력 2025-12-03 15:42:40 수정 2025-12-03 16: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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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고립보고서] 2편 대구 고립 지형 대해부
대구 고독사 위험군 1만682명 주소 전수 분석…'고립 밀집지' 나와
영구임대·원룸고시원·노후주택 등에 집중…쪽방도 고위험지역
전문가 "'생활권 단위'로 고립 대응 모델을 구축해야"

지난달 19일 대구 북구 복현1동 골든플라자(복현SKY)가 대학가 원룸 건물들 사이에서 36년째 방치돼 있다. 외벽에
지난달 19일 대구 북구 복현1동 골든플라자(복현SKY)가 대학가 원룸 건물들 사이에서 36년째 방치돼 있다. 외벽에 '근일공개' 문구가 붙어있지만, 오랜 기간 공사가 중단되면서 도심 속 흉물이 됐다. 김영진 기자 kyjmaeil@imaeil.com

◆우울한 혜지 씨의 방…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대구 북구 복현1동의 복현오거리. 경북대와 영진전문대를 사이에 둔 이 교차로는 상습 정체 구간이다. 출퇴근 시간이 아니어도 곧잘 막힌다. 조급한 경적 소리와 신경질적으로 차선을 바꾸는 차들, 고개를 숙인 채 걸음을 재촉하는 행인들이 한 데 뒤엉켜 어지러운 풍경을 그린다.

이 혼잡한 거리를 마주한 채 30년 넘게 가림막 안에 '밀봉'된 건물이 있다. 지하 7층, 지상 17층 규모로 1989년 착공됐지만 미완으로 남은 골든프라자다. 외벽에 붙은 '근일공개' 문구가 무색하게, 오랫동안 도심 속 흉물로 불렸다.

임혜지(가명·37) 씨는 골든프라자 뒷편 원룸에 산다. 창문 너머로 그 건물이 보인다. 혜지 씨는 그 '뷰'가 싫다. 자신의 처지와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가림막 속 건물처럼, 혜지 씨도 한 칸짜리 방 안에 밀봉돼 있다.

혜지 씨는 8년 전 도망치듯 이 동네에 왔다. 그의 양부모는 30년간 학대를 지속했다. 독립할 돈도, 용기도 없던 혜지 씨는 긴 시간을 폭력에 순응하다, 한 종교단체의 도움을 받아 복현1동에 원룸을 구했다. 그 집에서 도망치던 날 혜지 씨가 챙겨갈 수 있었던 건 약간의 옷가지와 안구진탕·사시·시신경 변형 같은 병뿐이었다. 눈앞이 흐릿해도, 30년에 걸친 학대의 트라우마는 선명하다.

양부모로부터 분리됐지만, 상태는 계속 나빠졌다. 심한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이 혜지 씨를 덮쳤다. 일주일에 한 번, 병원을 가는 날을 빼면 좁은 방 안에서 혼자 시간을 보냈다. 직업도 가질 수 없었다. 이 시간이 길어질수록 무기력도 깊어졌다. "평범한 30대 여자로 살고 싶다"는 바람과 반대로 서서히 고립돼 갔다.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두통과 불안 증세가 시달려요. 사람을 만나는 게 무서워요."

혜지 씨의 고립은 가족 해체, 만성 질병, 복지 공백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다. 이러한 구조적 고립은 대구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여전히 고립을 개인의 성향이나 일시적 선택으로 해석하곤 한다.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한다면 이들의 고립은 앞으로도 은폐될 것이고, 그에 따른 사회적 비용도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다.

◆대구의 고립자 1만여명…최초 분석

매일신문은 고립의 구조적 양상을 확인하기 위해 대구시와 8개 구·군(군위군 제외)이 관리하는 고독사 위험군 1만682명(2023~2024년 조사)에 대한 자료를 단독 입수했다. 이들은 대구에 사는 또다른 혜지 씨였다. 이들의 주소 데이터를 토대로 142개 모든 행정동의 인구 대비 위험군 비율을 산출해 도시 전체의 고립 지형을 분석했다.

대구 고립 지형도
대구 고립 지형도

그 결과, 고립의 위험은 특정 지역에 집중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인구 대비 위험군 비율이 가장 높은 행정동은 북구 복현1동(27.8명/천명)이었다. 달서구 상인3동(25.3명)과 월성2동(23.5명), 남구 대명1동(16.0명)이 그 뒤를 이었다. 이 상위 4개 동의 위험군 평균 비율은 인구 1천명당 23.2명. 대구 142개 행정동 평균(5.2명)의 4.5배에 달하는 '고립 밀집지'다.

이들 지역에는 단순히 위험군이 몰려 있는 것만이 아니었다. 고립을 구조화하는 주거유형이 함께 모여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다른 상위 행정동에서 유사하게 나타났다.

위험군 비율이 가장 높은 복현1동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원룸·고시원촌이 형성된 지역이다. 그 때문에 20~30대 비중과 1인 가구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다. 계명대가 있는 달서구 신당동(13.9명/천명) 역시 원룸과 고시원이 밀집해 있어 비슷한 특성을 보인다.

상인3동과 월성2동에는 대구의 상징적인 영구임대아파트가 있다. 30년이 훌쩍 넘은 이 아파트들은 늙고, 병들고, 가난한 1인 가구로 차있다. 상인3동에 있는 비둘기아파트는 전체 2천827세대 중 독거노인이 47%, 기초생활수급세대는 76%로 매우 높은 비중을 보였다. 월성주공2단지아파트(2천364세대) 역시 독거노인은 44.3%, 기초생활수급 세대는 70.1%로 나타났다.

대명1동은 대구의 대표적인 노후주택가다. 대명3(14.4명)·9동(13.7명)을 포함한 대명동 일대가 대부분 그렇다. 대명동 전체 건축물 1만3천여 호 중 71%에 해당하는 9천200여 호가 30년 이상 된 노후 건물이다. 송현1(15.8명)·2동(16.0명)과 수성구 범어2동(15.6명) 역시 1970년대에 지어진 대규모 저층 주택지로 고립 가구가 밀집해 있다.

위험군 실태조사에선 포착되지 않았지만 쪽방촌은 고립의 위험도가 매우 높은 주거 형태다. 절대적인 인구 수(대구 전체 약 530명)가 많지 않고, 주민들이 조사 자체를 거부하는 경우 많아 통계로는 잡히지 않을 뿐이다. 대구 쪽방주민의 절반 이상은 서구 비산7동(약 90명), 중구 성내2동(80명), 동구 신암4동(70명), 중구 대신동(60명)에 몰려있다.

◆'사는 집'이 고립의 형태를 결정…'생활권 단위'로 고립 대응해야

네 주거유형 모두 저렴한 주거비용, 좁은 공간, 물리적 폐쇄성, 취약계층 밀집 등의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고립이 발생·심화되는 메커니즘은 조금씩 달랐다. 본지는 각 주거 유형별로 12~18명의 고립 가구를 선정해 설문조사를 진행했고, 전문가 자문을 통해 유형별 특징을 분석했다.

원룸과 고시원에 사는 이들은 네 유형 중 가장 높은 수준의 외로움과 우울감을 호소했다. 외로움이나 우울감을 '거의 매일' 느낀다는 응답은 54%로 가장 높았다. 꾸준히 연락 가능한 가족 또는 지인은 평균 약 1.31명에 그쳤다. 또한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복지사'를 뽑은 비율은 7.7%에 불과해 복지 개입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것으로 파악됐다.

영구임대아파트 거주자들은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복지사'를 뽑은 비율이 33%로 타 주거유형 대비 가장 높았다. 복지 지원 시스템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는 의미다. 이들은 대체로 장기간 홀로 살아온 이들이었다. 평균 19.2년 동안 혼자 지냈고, 3명 중 1명은 연락 가능한 가족이나 지인이 한 명도 없었다.

노후주택가의 고립은 두 방향으로 나뉘었다. 거주자의 78%는 현 거주지에서 산 기간이 3년 이하였다. 이들은 저렴한 방을 찾아 이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22%는 10년 이상 머물며 고립이 장기화된 상태였다. 전자는 불안정한 생활 조건에서 비롯된 고립을, 후자는 한 곳에 오래 머무르며 자연스럽게 관계망이 단절되는 고립을 겪고 있었다.

쪽방촌의 고립은 가장 극단적이었다. 쪽방 주민의 57%는 연락 가능한 가족이나 지인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외로움이나 우울감을 '잘 느끼지 않는다'고 응답한 비율이 절반에 달했다. 실제 고립 정도와 주관적인 인식 사이에 괴리가 있는 것이다. 쪽방촌의 고립가구는 사회 관계망 회복의 동력까지 소진된 상태였다.

이번 분석은 고립의 지형을 행정동·주거형태 단위로 드러낸 첫 시도다. 고립 가구가 특정 동네와 주거 형태에 응집돼 있다는 사실은 고립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간 구조와 생활 조건 속에서 형성되는 현상임을 보여준다.

전문가들은 주거 형태에 따라 고립이 쌓이는 과정을 심층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사회적 고립을 해결할 '열쇠'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와 관련 사회적 고립 전문 연구기관 스스로랩의 송인주 대표는 "고립사한 인물의 생활 조건을 잘 설명해주는 내용은 의(衣)도 식(食)도 아닌 주(宙)"라며 "실제 고독사 사망자의 사회적 부검을 위해 현장 조사를 해보면 대부분 취약 주거지에 밀집해 있다. 이런 주거 환경은 사람을 더 고립되게 하고 위험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방임하게 하는 요소로 작용한다"고 밝혔다.

강상훈 대구보건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고독사에 비해 '고립' 위험에 대한 기초 연구는 거의 전무한 수준이다. 대구 모든 행정동 단위를 미시적으로 분석해, 고립의 실태와 복합적 위험을 심층적으로 규명하는 시도는 의미가 크다"라며 "지자체가 단순 통계를 넘어, 현장 정보와 결합된 '생활권 단위' 대응 모델을 구축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 기사는 대구보건대의 연구지원과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의 기획지원을 받아 작성됐습니다.

지난달 4일 대구 북구 복현 1동 주택가 골목에서 한 노인이 폐지를 줍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지난달 4일 대구 북구 복현 1동 주택가 골목에서 한 노인이 폐지를 줍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