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에, 사촌에" 측근 부패가 촉발…스페인 반정부시위

입력 2025-12-02 16:07:48 수정 2025-12-02 16: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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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총리 부인, 직권남용 혐의 기소
홍수 방지 사업 부패 스캔들, 필리핀
마르코스 Jr. 대통령도 뇌물 수수 의혹

11월 30일(현지시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반정부시위에서 시위대들이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을 흉내낸 인형을 들고 말라카냥 궁전으로 행진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11월 30일(현지시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반정부시위에서 시위대들이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을 흉내낸 인형을 들고 말라카냥 궁전으로 행진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지도자만 청렴하다고 될 일이 아니다. 측근 관리에 소홀하면 정권의 위기가 닥친다. 우리나라 얘기가 아니다. 지도자의 부인이 말썽인 곳은 스페인이다. 페드로 산체스 총리의 부인 베고냐 고메스가 직권남용 혐의 등으로 기소되면서 정권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필리핀도 측근들이 대거 부패 의혹에 연루되면서 반정부시위가 격화하고 있다. 홍수 방지 사업 부패 스캔들에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의 사촌 등 측근들이 이름을 올리며 줄사퇴했다. 성난 민심이 거리에서 분출되며 지도자의 책임을 따져 묻고 있다.

◆스페인, 총리 부인이 불 붙인 반정부시위

스페인 반정부시위는 산체스 총리 퇴진과 조기 총선 요구 목소리로 수렴되고 있다. 산체스 총리는 중도좌파로 분류되는 사회노동당을 이끌다 2018년 6월 집권 국민당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을 통과시켜 총리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좌파 성향 인물이 국민적 저항을 피할 수 없었던 건 부인과 측근의 부패 혐의 때문이었다.

산체스 총리의 부인 베고냐 고메스는 올해 8월 공금 횡령 혐의로 추가 기소되면서 총리 퇴진 요구 목소리를 키웠다. 고메스는 콤플루텐세대학에 재직하는 동안 개인 업무를 위해 총리실 보좌관을 동원하고 국가 예산으로 그의 급여를 지급한 혐의를 받고 있다.

11월 30일(현지시간) 스페인 야당인 국민당이 주최한 반정부시위에서 시위대들이 스페인 국기를 흔들고 있다. EPA 연합뉴스
11월 30일(현지시간) 스페인 야당인 국민당이 주최한 반정부시위에서 시위대들이 스페인 국기를 흔들고 있다. EPA 연합뉴스

고메스를 피고인으로 못 박은 부패 혐의는 또 있다. 지난해에도 직권 남용 및 부패 혐의로 기소된 바 있다. 당시 마드리드 법원은 산체스 총리의 부인 고메스의 직권남용 의혹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고메스가 지인들의 정부 계약 수주를 위해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등을 들여다본 것이었다.

산체스 총리는 우파 야당 진영의 정치적 공세 탓이라고 맞서며 아내를 감쌌다. 그는 당시 "극우 성향 사이트의 추정 보도를 근거로 한 정치적 공세로부터 아내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적극 조사에 협력할 것"이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수사는 극우 성향 시민단체인 '마노스 림피아스'(깨끗한 손)의 고발로 촉발됐다. 마노스 림피아스는 "고메스가 아프리카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에어유로파라는 항공사로부터 특혜를 받았고, 이후 에어유로파가 정부의 구제금융을 받는 데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주장했다.

설상가상 산체스 총리 측근들에게도 부패 의혹이 제기됐다. 호세 루이스 아발로스 전 교통부 장관은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 위생 장비를 공급받는 정부 계약을 체결하면서 리베이트를 챙긴 혐의로 최근 구속됐다. 보좌진들에 대한 수사도 진행중이다.

11월 30일(현지시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집회에서 시위대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의 얼굴을 희화화한 인형을 앞세워 행진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11월 30일(현지시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집회에서 시위대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의 얼굴을 희화화한 인형을 앞세워 행진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필리핀, 국민 목숨 담보로 리베이트

최근 연이은 태풍과 홍수로 수백 명의 인명피해를 입은 필리핀에서도 대규모 홍수 방지 사업을 둘러싼 부패 스캔들이 불거지며 민심이 폭발했다. 필리핀은 올 여름 태풍 '라가사'와 '부알로이'의 악몽이 사그라들기도 전에 태풍 '갈매기'와 '풍웡'이 차례로 덮치면서 인명 피해가 컸다. 문제는 방재 관련 예산이 적시적소에 쓰였다면 규모를 줄일 수 있었던 피해였다는 것이다.

일명 '홍수 방지 사업 부패 스캔들'이다. 지난 7월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의 국정연설에서 불거져 나왔다. 당시 대통령은 장기간 이어진 심각한 홍수 피해의 원인으로 '부패'를 지목하면서 관련 예산이 제대로 쓰이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필리핀 재정부는 2023년부터 2025년까지 홍수 방지 사업 부패로 우리 돈 최대 3조 원의 손실이 발생한 것으로 추산한다고 발표했다.

이후 진행된 정부 조사에서 나랏돈을 탐한 이들이 드러났다. 2022년 이후 홍수 방지 사업에 투입된 약 13조 원 가운데 상당 부분에서 부실시공과 허위 문서 작성이 확인됐다. 400건 이상의 프로젝트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유령 프로젝트'였다. 건설사와 고위 공무원이 담합해 관련 예산을 횡령한 정황도 드러났다.

국회 청문회에서도 공공사업 담당 정부 고위관계자와 건설사 고위관계자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국회의원과 정부 관료가 건설사로부터 리베이트를 수수하고 계약 수주에 특혜를 준 것으로 확인됐다. 기가 막히는 대목은 정부 관료들의 증언이었는데 지난 15년간 홍수 방지 사업에 투입된 38조 원 가운데 최소 25~30%가 리베이트로 새나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었다.

11월 30일(현지시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시위에서 한 시위자가 필리핀 부통령 사라 두테르테(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필리핀 대통령의 딸)의 얼굴을 본뜬 가면을 쳐다보고 있다. AP 연합뉴스
11월 30일(현지시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시위에서 한 시위자가 필리핀 부통령 사라 두테르테(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필리핀 대통령의 딸)의 얼굴을 본뜬 가면을 쳐다보고 있다. AP 연합뉴스

대통령과 사촌지간인 마틴 로무알데스 하원의장을 비롯해 프랜시스 에스쿠데로 상원의장, 조엘 빌라누에바 상원 다수당 원내대표, 징고이 에스트라다 상원 임시의장 등 측근들이 사임했고 대통령의 오른팔인 비서실장과 행정장관, 예산장관도 뇌물 스캔들에 연루된 의혹으로 물러났다. 최근에는 대통령도 뇌물을 받았다는 주장이 나왔다. 뇌물 스캔들에 연루되면서 의원직을 내려놓은 잘디 코 전 하원의원은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이 홍수 사업과 관련해 우리 돈 6천억 원이 넘는 돈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민심은 폭발했다. 가두시위에 나선 시위대는 부패 스캔들에 연루된 이들을 더 신속하게 기소할 것을 요구했다. 여기에는 가톨릭 성직자들도 동참했다. 가톨릭은 필리핀 국민 절대다수(80% 이상)가 믿는 국교나 마찬가지다. 이들이 행동에 나섰다는 것은 정권의 도덕성이 위험 수위를 넘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