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유교문화원, 11일 경북유교문화회관 교육관
국립경국대 황만기 교수, '현실인식과 학문' 발표
임진·병자년 전쟁과 정치부패 속 '隱中之參' 확립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전쟁과 정치 부패 등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때 평소 배운 바를 실행한, 학문적 바탕의 의리 정신을 근간으로 '隱中之參'(은거 속에 참여)이라는 새로운 지식인상을 확립한 선비들의 삶을 되돌아보는 소중한 학술발표회가 열렸다.
(사)경북유교문화원(이사장 이재업)이 11월 11일 경북유교문화회관 교육관에서 '송오 정전과 우천 정칙의 현실인식과 학문'을 주제로 한 '제15회 처사의 삶 학술발표회'를 마련했다.
이날 학술발표회에서는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때 벼슬에 나서지 않고 향촌에 은거했던 선비들이 도학적 수양을 바탕으로 시대의 병폐를 직시하고, 은거 속에서도 공공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살펴봤다.
이날 학술발표회에는 이재업 이사장과 청주정씨 안동종친회 정상호 회장을 비롯한 청주정씨 문중 종손과 사람들, 이목(온계종손) 영종회 회장과 경북 명문명가 종손들, 김종길(학봉종손) 박약회 회장, 이재갑·정복순·김정림 안동시의원, 김의승 전 서울시행정1부시장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날 발표는 황만기 국립경국대학교 연구교수가 맡았으며, 청주 정씨 가문의 송오(松塢) 정전(鄭佺·1569~1639)과 우천(愚川) 정칙(鄭侙·1601~1663)의 학문과 정치적 혼란 시기의 도학의 회복과 현실적 비판에 대해 설명했다.
송오 정전은 퇴계–학봉 학맥의 중간 세대를 대표한다. 학문은 퇴계 이황과 학봉 김성일의 도학을 계승했고, 인품은 효행·청렴·온화로 알려졌다.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향촌에 은거하며 '산림처사'의 전형을 보였다.
그는 임진왜란 이후의 정치적 혼란과 향촌 질서의 붕괴 속에서, 정전은 도학의 회복과 예학적 질서 확립을 시대적 과제로 인식했다. 그의 상소문 '상방백서', '상진휼사서' 등은 향민의 고통을 대변하며, 조세제도·군역제의 불합리와 향리의 부정을 구조적 문제로 지적했다. 이는 단순한 도덕 담론을 넘어 제도적 부패에 대한 현실적 비판 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그의 학문과 실천은 '경(敬)'과 '성(誠)'의 실천을 핵심으로 하며, 이론보다 생활 속 도학을 중시했다. 학문은 벼슬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인격 완성과 사회 도덕 회복의 도구로 여겼다.
예학(禮學)을 통해 향촌의 예속을 도학 실천의 장으로 삼았고, 퇴계의 제향일에 혼례를 피하도록 권한 일화는 그의 예학적 교화 의식을 보여주었다.
우천 정칙은 정사신의 아들로, 정전의 종질(從姪). 광해군대의 혼란 이후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 전념했으며, 장릉참봉에 제수됐으나 벼슬을 사양했다. 말년에는 안동 구성 남쪽 '우천'에 은거, 스스로를 '우천은자'라 칭했다
그는 1636년 병자호란 직전, 36세의 나이에 쓴 '논시사죄언'에서 붕당정치의 폐단과 기강 해이를 국가 붕괴의 원인으로 지적했다.
처사로서 정치 논의를 삼가야 한다는 겸양을 표하면서도, 백성을 위한 충정에서 현실을 통렬히 비판했다. "당쟁만 없앨 수 있다면, 오랑캐의 먼지도 쓸어낼 수 있다"(但能消黨論. 便足掃胡塵)라는 구절은 그의 핵심 인식을 보여준다
전쟁과 정치적 부패 속에서도 벼슬하지 않고 '愚人'(어리석은 자)의 길을 자처했다. 은거는 회피가 아니라 도학적 실천의 또 다른 형태였다. 또한 서원 배향과 선현 현창에 적극 참여해 향촌 윤리의 회복을 꾀했다. 그의 제문과 시문은 지역의 역사적 정체성과 도덕 공동체 형성에 기여했다.
황만기 교수는 "두 사람은 퇴계학파 처사 문인의 두 축으로, 정전은 '도덕의 회복을 향촌에서' 실천했고, 정칙은 '도학의 책임을 현실 속에서' 구현했다"며 "이들은 조선 후기 영남 유학에서 '은거 속의 참여'(隱中之參)라는 새로운 지식인상을 확립한 대표적 인물로 평가된다"고 밝혔다.
이재업 (사)경북유교문화원 이사장은 "두분 모두 격동의 시대를 살면서 깊은 절의를 보여 주였다. 오늘날 우리가 배우고, 가슴에 새겨야 할 가르침이 매우 클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