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명절 연휴, 지인(知人)들과 건강보험료 얘기를 나누다 그들의 납부액을 듣고 깜짝 놀랐다. 혹 잘못 들은 것 아닌가 해서 확인까지 했다. 그런데 1억원 맞단다. 1년 동안 벌기도 힘든, 말 그대로 '억 소리' 나는 액수다. 연봉 5천만원을 받는 직장인이라면 연간 200만원 조금 덜 낸다. 일반 직장인은 상상도 못 할 금액이다.
가장 먼저 속상하지 않은지 물었다. 아무리 많이 벌어도 '생돈' 1억원을, 그것도 매년 낸다는 게 어디 예삿일이겠나. 각종 공제(控除)액을 다 합한 것도 아니고 건보료만 1억원을 내야 한다니 다소 억울한 마음도 들 것 같아서다. 역시나 속상하다고 했다. 그런데 1억원이 아깝다는 하소연이 아니었다. 많이 버니 사회 환원 차원에서 많이 낼 수 있다고 했다. 속상한 건 너무 당연하다는 반응, 돈 많이 버는 것 자체를 곱지 않게 보는 시선이라고 했다. '돈은 돈대로 많이 내고 욕은 욕대로 먹는 게' 속상하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처럼 부자들에 대해 인식이 안 좋은 나라도 찾기 힘들긴 하다. 혼돈의 시기, 친일·친미(親美)하며 부를 축적한 이들이 많았던 것도 맞다. 여러 역사적 배경은 뒤로하고라도 '부자들은 다 도둑놈'이라는 인식에, 많이 부담해도 된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게 사실이다. 돈 많으니 많이 내는 건 당연하다 생각하면서 돈 많이 버는 건 좋게 보지 않는 이상한 심리 말이다.
'건보료를 1억원이나 낼 정도면 도대체 얼마를 번다는 거야' 하는 반감이 느껴지기도 한다고 했다. '얼마나 벌길래 1억원을 낼 수 있는지'가 궁금할 순 있지만, 궁금증과 반감의 어감이 다르다는 것이다. 반감형 의문에선 부러움과 의심, 질투 등 부정적 감정이 단번에 느껴진단다. 건보공단에 따르면 직장가입자의 경우 건보료 상한(上限)은 올해 기준 월 900만8천340원이다. 연간으로 환산하면 약 1억800만원 정도다. 월급 1억2천700만원 이상(연봉 15억2천460만 원 이상)을 받는 고소득 직장인이 해당된다.
아무리 많이 번다 해도 역지사지(易地思之)해 보면 건보료만 1억원을 내는 건 쉽지 않다. 병·의원 이용이 많지 않은 사람이라면 더욱 억울할 수 있다. 많이 낸다고 의료 서비스 이용 시 받는 혜택도 없다. 건보료 1억원치를 이용하려면 병원에서 아예 살아야 하지 않겠나. 달리 말하면 그렇지 않은 많은 국민이 이들이 내는 건보료 혜택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제도 개선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소득 상위층의 보험료가 과도하니 보험료 부과 구조 전반에 대해 재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소득 수준이 가장 낮은 1분위 지역가입자의 경우 2023년 기준 1천25억원의 보험료를 내고 보험 급여로 4조1천910억원을 받았다. 납부(納付)한 보험료의 41배다. 반면 기준 소득이 가장 높은 10분위 가입자들이 낸 보험료는 지난해 4조3천55억여원으로, 1분위 가입자 1천161억여원보다 37배 이상 많았다. 많이 내고도 불편한 시선까지 감수해야 한다면 속상할 수 있을 것 같다.
부자에 대한 인식을 바꾸자는 원론적(原論的)인 얘기는 아니다. 다만, 돈 많이 벌어서 상대적으로 적게 버는 이들을 위해 보이지 않게 기여하고 있는 이들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볼 수는 있지 않을까 해서다. 거창할 거 없이, 병원 갈 때나 진료 기다리다 가끔 이름 모를 그들을 위해 고마운 마음, 앞으로도 번창하기를 바라는 마음 한번 가져 보면 어떨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