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삼의 근대사] 개천절은 어쩌다 국경일이 되었을까?

입력 2025-09-30 04: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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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10월 3일 개천절이 되면 정부 차원의 거창한 국경일 기념행사가 열린다. 사진은 1978년 개천절 기념식.
해마다 10월 3일 개천절이 되면 정부 차원의 거창한 국경일 기념행사가 열린다. 사진은 1978년 개천절 기념식.
국조 단군의 표준영정. 단군이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나라를 세운 연도가 서기전 2천333년 10월 3일인지 아닌지 객관적이고 확실하게 입증할 수 있는 어떠한 근거도 없다.
국조 단군의 표준영정. 단군이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나라를 세운 연도가 서기전 2천333년 10월 3일인지 아닌지 객관적이고 확실하게 입증할 수 있는 어떠한 근거도 없다.
신채호는 조선 멸망 후
신채호는 조선 멸망 후 '단군의 성지'로서의 만주를 슬그머니 역사 무대로 끌어냈다. 단군이란 존재가 한국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일제 시대부터였다. 그전에는 단군이란 존재를 아는 한국인은 거의 없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양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경축하고, 대종교는 음력 10월 3일에 인천 강화군 마니산 참성단에서 별도의 제천행사를 한다. 사진은 마니산 참성단에서 거행된 대종교의 제4473주년 개천절 홍익대제 선의식 모습.
대한민국 정부는 양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경축하고, 대종교는 음력 10월 3일에 인천 강화군 마니산 참성단에서 별도의 제천행사를 한다. 사진은 마니산 참성단에서 거행된 대종교의 제4473주년 개천절 홍익대제 선의식 모습.

10월 3일은 개천절(開天節)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근거하여 이날을 "나라의 경사스러운 날"이라고 하여 국경일(國慶日·National Holidays)로 지정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3·1절(3월 1일), 제헌절(7월 17일), 광복절(8월 15일), 개천절(10월 3일)을 4개 국경일로 제정하여 기념하다가 2006년에 한글날(10월 9일)이 추가되어 5대 국경일이 되었다.

대한민국 국기법에 따라 국경일에는 국기를 게양해야 하며, 제헌절을 제외한 국경일은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휴일과 일정이 겹치면 대체휴일이 생긴다. 또, 개천절을 기념하는 노래도 만들어졌다.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이 나라 한 아버님은 단군이시니/ 이 나라 한 아버님은 단군이시니'라는 이 노래는 1910년대 대종교에서 부르던 것을 1949년 정인보가 개사하고 김성태가 편곡하여 제정했다.

그렇다면 개천절이 대체 무슨 날이기에 국경일로 지정하고, 국기를 내거는 등 범국가 차원에서 기념하는 것일까? '하늘이 열린 날'이란 뜻의 개천절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우리 민족 최초 국가인 고조선 건국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국경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쉽게 설명하면 서기전 2천333년, 음력 10월 3일에 국조(國祖) 단군의 고조선 개국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한 날이란 뜻이다.

여기서 중대하고 심각한 문제가 몇 가지 제기된다. 첫째, 단군이 나라의 시조라고 알려져 있는데, 단군이 정말로 이 나라 이 민족의 시조가 맞는가. 둘째, 그가 세웠다는 고조선 개국일이 서기전 2천333년이고, 10월 3일에 나라를 세웠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셋째,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한국인들이 고조선 개국과 단군을 기념해야 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이성적이고 합리적 시각으로 의문점들을 추적해 보기로 한다.

◆단군이 우리의 시조?

첫째, 단군은 누구인가를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는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확한 명칭은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고 하는데, 단군은 이름이고 왕검은 군주를 뜻한단다. 대종교에서는 단군을 왕명으로 해석하여 1대 단군, 2대 단군 등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더 솔직하게 속내를 표현하면 한국의 전문 사학자들조차 단군이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모른다는 뜻이다.

일제 시기 이전까지 한국인들에게 단군은 전혀 낯선 존재였다. 그전까지는 우리 역사의 주역은 단군이 아니라 기자(箕子)라는 중국인이었다. 중국에서 5천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한반도로 건너와 한민족에게 문명을 일깨웠다고 알려진 그 중국인을 한국인들은 몇천 년간 민족의 시조로 추앙하고 기려온 것이 정확한 역사적 실상이다.

기자라는 중국인이 조선에 왔는지, 안 왔는지를 입증할 수 있는 어떤 근거나 사료도 없다. 그런데 소중화 모화(慕華)사상에 젖어버린 이 나라 사람들은 중국에서 온 기자를 자기들 핏줄의 직계 조상이라고 족보에 기록하여 거룩하게 섬기고 있다. 행주 기씨(奇氏), 서씨(徐氏), 태원 선우씨(鮮于氏), 청주 한씨(韓氏)가 그 주인공이다. 또, 기자를 수행해 온 5천여 명의 중국인이 자기들 핏줄의 직계 조상이라고 우기는 성씨는 태인 경씨(景氏), 해주 경씨(景氏), 토산 궁씨(弓氏), 봉화 금씨(琴氏), 함평 노씨(魯氏), 함풍 노씨(魯氏) 등이다.

참으로 미안하고 송구한 이야기지만, 단군이 한민족의 시조로 등장한 시기는 반만년 전이 아니라, 나라를 잃은 후인 일제 시절의 일이었다. 국권을 상실한 한국인들이 기댈 언덕은 민족이었다. 이때부터 백두산, 만주, 중국대륙이 우리 조상들의 놀이터였다는 주장들이 주장이 난무했다.

신채호는 '단군의 성지'로서의 만주를 슬그머니 역사 무대로 끌어냈다. 1908년 신채호는 단군조선의 발상지를 백두산 아래 압록강 유역이라고 주장했다. 1915년에는 북만주 쪽으로 옮겨 흑룡강북으로 비정했으며, 1918년부터는 단군 강역의 범위를 남만주에서 중국대륙 동쪽 전역으로 확장시켰다.(주효뢰, '식민지 조선 지식인, 혼돈의 중국으로 가다', 소명출판, 2020, 100~102쪽)

박은식은 단군조선의 강역을 만주 일대를 넘어 산해관(山海關) 남쪽 영평부(永平府)까지라고 주장하고 나섰다.(주효뢰, 앞의 책, 103쪽) 단군과 백두산, 그리고 '단군의 성지'로서의 만주를 우리 역사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 주인공은 최남선이었다. 그는 '단군'으로 표상되는 백두산을 민족적 상징으로 삼기 위해 1926년 7월 28일부터 1927년 1월 23일까지 총 89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백두산 근참기'를 연재했다.

최남선에게 백두산 기행은 단군 탄신 강림의 성지로서의 백두산을 민중 의식 속에 널리 전파하기 위한 종교적 순례였다. 나라가 망한 후 그들은 일본에서 'nation'을 번역한 '민족'이란 용어에 매달렸고, 한민족의 상징물로 '배달겨레', '단군의 자손'을 창출해 냈다. 일제 시대에야 슬그머니 국수적 사학자들에 의해 우리 역사에 머리를 디밀고 나타난 단군이 나라의 시조라면, 그렇게 주장하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10월 3일 개천절은 일종의 판타지

둘째, 고조선의 건국 시기(연도)와 날짜가 언제인가를 명확한 근거를 통해 학문적으로 밝힐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월 3일이 개천절로 둔갑한 근거는 대종교 경전인 '삼일신고'(三一神誥)이다. 이 경전이 전해져 온 사연과 그 내용은 너무나 황당무계하므로 생략한다.

이 경전에 등장하는 "한배님(환웅)이 갑자년 10월 3일 태백산에 강림하여 125년간 교화 시대를 지내고 무진년(戊辰年) 10월 3일부터 치화(治化)를 시작했다"라는 구절이 개천절의 근거로 등장했다. 한배님, 즉 환웅이 태백산에 강림한 시기를 서기로 환산하면 기원전 2천357년, 치화를 시작한 해는 기원전 2천333년이 된다는 것이다.

대종교는 1909년 음력 1월 15일 나철이란 사람이 서울 가회동에서 오기호·이기·정훈모 등과 함께 조직한 단군교가 그 뿌리다. 단군과 천신(天神)을 신앙하는 민족종교인 단군교는 1910년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었다. 나철은 환인·환웅·환검은 단군의 다른 이름이라면서 단군을 천신과 일체화했다. 이들은 음력 10월 3일이 단군 대황조께서 나라를 세우고 참된 도를 세운 날이니 민족의 성절인 개천절로 기려야 한다고 주창했다. 이때서부터 음력 10월 3일은 대종교의 축일이 되었다.

아무런 객관적, 과학적, 합리적 근거도 없는 날짜와 연도, 스토리가 사실로 둔갑하는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언론이었다. 황성신문은 "우리는 단군을 기념함으로써 우리가 문명 민족임을 세상에 발표해야 한다. 10월 3일이 꼭 역사적 사실에 합치된 날짜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그 날짜가 좋은 때니 그날 단군을 기념하자"(1909년 11월 21일 자 논설)라고 맞장구를 쳤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아셨겠지만, 개천절은 '역사적 사실'과는 하등 관계없는 판타지의 결과물이다. 또 대종교라는 특정 종교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대한제국이 망하자, 대종교 지도부는 신도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한다. 1914년 5월, 대종교는 총본사를 자신들이 영지라고 믿는 백두산 가까운 화룡(和龍)현 삼도구 청파호로 옮겼다. 대종교는 교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연길 등을 중심으로 자유공단(自由公團)이라는 독립운동 비밀결사를 조직했다('한국독립운동사3', 국사편찬위원회, 1968, 954쪽).

◆대종교 축일이 국경일로 둔갑

대종교 지도자나 교인 중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한 사람은 서일을 비롯하여 신규식·김두봉·박찬익·이상설·박은식·신채호·김좌진·홍범도·안희제 등 여러 명이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도 대종교 교인들이 대거 참여했다. 의정원 의원 29명 중 대종교 원로가 21명이었고, 의장에 선출된 이동녕, 정부 조직에 임명된 13명 중 11명이 대종교 원로였다(현규환, '한국유이민사상', 삼화출판사, 1976, 571쪽).

중국에서 유랑 걸식하는 것과 비슷한 처지였던 임정은 만주에 근거지를 확보하고 있던 대종교에 큰 신세를 졌다. 또, 임정 요인 가운데 다수가 대종교 지도자, 혹은 교인이었다. 자연스럽게 임정 요인들은 대종교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덕에 대종교가 역사적 사실과 전혀 관련 없고, 믿거나 말거나 식의 내용을 근거로 대종교 축일(음력 10월 3일)을 임정 차원의 기념일로 숭모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임정은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음력 10월 3일을 한민족이 기원한 기념일로 정했다. 하지만 타 종교인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기념일 명칭만은 대종교 축일인 개천절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대황조성탄(大皇祖聖誕) 및 건국 기원절'로 정해 임정 국무원 주관으로 축하 의식을 거행했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1949년) 이승만 정부는 임정이 행했던 역사와 전통을 답습하여 개천절을 국경일로 지정했다. 이때 기괴하고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음력 10월 3일이었던 날짜를 양력 10월 3일로 바꾸었고, 명칭은 대종교 축일 명칭인 개천절을 그대로 갖다 붙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타종교 인사들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개천절' 명칭이 대종교의 축일이란 사실을 알지 못하니 그에 대한 저항 없이 수용되어버린 것이다.

이로써 대종교에서 행하던 경하식(慶賀式)이 국가 의전행사에 맞춰 양력 10월 3일 거행하게 되었다. 대종교는 이와는 별도로 자신들의 제천의식은 대종교의 전통적 선례에 따라 음력 10월 3일 상오 6시에 마니산의 제천단, 태백산의 단군전, 사직단(社稷壇)의 백악전 등에서 올리고 있다.

매년 10월 3일이 되면 전 국민은 영문도 모른 채 근거조차 불분명한 천신 강림의 존재를 '민족의 시조'라고 섬기고, 단군과 천신을 신앙하는 대종교의 축일을 양력으로 바꿔치기한 날을 '하늘이 열린 날'이라고 운운하며 법정 공휴일로 지정해 대통령이 축사를 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이제 한국인들도 국수적 민족주의, 소위 국뽕에서 깨어날 때가 되지 않았을까?

펜앤드마이크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