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강우 시인
수오재(守吾齋)는 정약용의 큰형 정약현이 자기 집에 붙인 이름이다. 풀이하면 '나를 지키는 집'이다. 신유사화(辛酉士禍)에 연루돼 장기(長鬐)로 귀양간 정약용이 어느 날 문득 그 당호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나를 지킨다? 굳이 지키지 않아도 내가 어디로 가겠는가.
그랬던 정약용이 스스로 답을 찾았다. 그는 먼저 지킬 필요가 없는 것들에 대해 얘기했다. 밭과 집, 꽃나무, 과일나무, 책, 옷, 양식 같은 것들이다. 아울러 '나'는 '드나드는 데 일정한 법칙'이 없다는 이유로 지킬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익, 위험, 재앙, 아름다운 음악 소리, 미인의 요염한 모습, 벼슬살이 따위가 나를 상실케 하는 요인이라고 부언했다.
여기서 나를 지킨다는 건 물질보다 정신의 가치를 우위에 둔다는 말이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에 진력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현실은 어떨까. 현대인들은 집을 지킨다고 하면 너무 생급스러운가? 이때의 집은 재산가치가 있는 부동산을 뭉뚱그려 말한 것이다.
요즘 자주 접하는 게 유명인들의 부동산 거래에 따른 차익 실현 보도이다. 정당한 방법으로 이윤을 얻는 행위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왜 안 그렇겠는가. 그들은 다만 집을 잘 지켰을 뿐이다. 문제는 과도한 보도가 어렵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끼치는 영향이다. 단 1억의 차익이라 해도 서민대중의 입장에선 언감생심이다. 게다가 지킬 집마저 없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단언컨대 땀 흘리지 않고 얻는 저와 같은 재화는 계층간에 위화감을 일으키는 쏘시개로 제격이다.
첨단 드론이 날아다니고 빗소리까지 재현하는 신시사이저가 출현한 시대에 연이나 활, 혹은 꽹과리, 반닫이를 만드는 장인은 뭘까. 그들은 무엇을 바라고 그런 일에 종사할까. 그들이야말로 '나'를 지키는 전형이 아닐까. 그러나 그들에 대한 얘기는 가물에 콩 나듯 어쩌다 들려올 뿐이다. 라캉이 그랬던가.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온전한 '나'를 제치고 타자의 시선에 부응하는 '나'를 찾는 이들이 너무 많다. 사정이 이럴수록 나를 지키며 사는 이들을 발굴하고 조명해야 하지 않을까. 언론을 사회의 목탁이라 하는 이유를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
기실 집을 지키는 건 좋은 일이다. 따사로운 볕을 쬐며 쪽마루에 앉아 집을 지키던 어떤 날의 아이를 기억한다. 그렇게 집을 지키다 보면 뭔가가 생긴다. 엄마의 손에 들린 호떡일 때도 있고 아버지의 손에 들린 군고구마일 때도 있다. 그때의 호떡과 군고구마를 불로소득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때 집을 지키던 내가 지금의 '나'를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