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태길 영남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경영학 박사)
캐나다 로키 트레킹 제2편
밴프국립공원에서 트레킹을 마친 뒤, 레이크 루이스 1번 도로에서 93번 하이웨이를 따라 재스퍼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아이스필드 파크웨이로 이어지는 이 길은 로키산맥의 품 안으로 북상하는 도로다. 밴프와 재스퍼 교차점에 있는 유일한 휴게소, 더 크로씽(The Crossing)에 들렀다. 차에서 내리자 모처럼 햇살이 반가워 하늘을 쳐다보았다. 트레킹 중에 보았던 그 어떤 풍경보다 화려한 모습을 한 봉우리가 눈앞에 나타났다. 해발 3,300m가 넘는 무르치슨산(Mount Murchison)이었다. 웅장한 무르치슨산을 둥글게 감싼 구름의 형상이 눈의 피로를 단숨에 풀어주었다. 카메라 셔터를 누를 때마다 장대한 풍경이 그대로 담겨 감탄이 이어졌다. 그 순간 재스퍼에서 이어질 여정에 대한 기대감이 한껏 고조되었다.

◆볼드힐 트레일(Bald Hills Trail), 총 14km, 약 6시간
볼드힐 트레일로 향하던 길목에 있는 메디슨 호수 주차장에 때마침 빅혼쉽(Bighorn Sheep) 한 마리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반갑고 놀라운 마음에 사진을 찍으면서도 덩치 큰 야생양이 돌발 행동을 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오히려 녀석은 태연한 눈빛으로 우리를 구경했다. 이내 뒤따르던 새끼 양들을 이끌고 까맣게 그을린 메디슨 호숫가를 가로질러 숲속으로 사라졌다.
메디슨(Medicine) 호수는 특이하게 여름에만 나타났다가 가을이 되면 보이지 않는 자연의 힘에 이끌려 사라지는 신비한 호수이다. 하지만 과학이 호수 밑 석회암 동굴과 싱크홀 구조가 물을 흡수해 가을과 겨울에는 대부분 지하로 빠져나가는 것이라고 설명해주기 전까지는 '사라졌다 나타나는' 마법의 호수라며 신성한 장소로 원주민들은 믿어왔다.
볼드힐 트레일의 출발점인 멀린(Maligne) 호수는 약 22km로 로키산맥에서 가장 긴 자연 호수다. 호수 선착장에서 크루즈를 타고 들어가면 만날 수 있는 스피릿 아일랜드(Spirit Island)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사진 명소다. 이 작은 섬은 뉴욕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의 코닥(Kodak) 콜로라마(Colorama)에 등장했다. 이 전시는 1950년부터 1990년까지 40년 동안 이어진 대형 옥외 광고(OOH)로, 코닥의 컬러 필름과 카메라를 알리는 상징 같은 무대였다. 멀린 호수의 스피릿 아일랜드가 지금처럼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게 된 데에는 '코닥은 행복한 순간'이라는 일관된 메시지가 큰 역할을 했다.
울창한 전나무 숲속을 가로지르는 넓은 진입로를 따라 걷는 발걸음은 비교적 가볍게 이어졌고 14km에 달하는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갈림길을 알려주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정상을 빨리 보고 싶은 조바심에 나는 가파른 지름길을 선택했다. 숨이 차오르는 고비를 넘기자 시야가 확 트이는 순간이 찾아왔다. 평야처럼 펼쳐진 고산지대는 퀸 엘리자베스 연봉들을 배경 삼아 장대한 풍경을 연출했다.

수목한계선을 지나 정상에 가까워지면서 바람이 거세지기 시작해 배낭에서 옷을 하나 더 꺼내 입었다. 마침내 끝이 보이지 않는 멀고 긴 멀린 호수를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정상에 다다랐다. 바이칼호에 이어 지구상에서 두 번째로 긴 호수인 만큼 산맥 꼭대기에서나 그 길이를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재빨리 점심을 먹고 정상 루프 구간을 따라 두 개의 볼드 힐을 넘나들었다. 이 트레일의 이름이 결정된 구간으로 풀도 나무도 없는 황무지 언덕이었다. 광활하게 펼쳐진 멀린 밸리의 장관을 마주하는데도 불구하고 볼드 힐은 삭막한 사막 한 가운데 서 있는 듯한 묘한 기분을 안겨주었다. 볼드 힐에서 내려오는 길섶에도 어김없이 귀여운 다람쥐들이 오가며 인사를 건넸고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의 걸음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무스(Moose) 몇 마리도 목격했다. 장장 6시간의 트레킹이 끝나고 멀린 호수로 돌아와 양말을 벗고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는 순간 진한 피로가 느껴졌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2024년 대형 산불이 휩쓸고 간 멀린 전망대에 섰다. 타버린 나무와 녹아내린 구조물 그리고 사라진 푸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 불길은 수많은 동물과 식물을 삼켰으며 재스퍼 국립공원 인근 주민들도 삶의 터전을 지켜내기 위해 사투를 벌여야 했다. 울창하던 침엽수림이 새까맣게 타버렸지만 검게 그을린 나무 사이사이에는 또 다른 초록들이 재스퍼의 햇살로 다시 자라나고 있었다. 산불 이후 재스퍼의 생태계 회복 과정은 기후변화가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과 변화된 풍경을 통해 자연 회복력이라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문득 올봄 고향 안동에서 겪은 초대형 산불이 떠올랐다. 연기 속에서 문화재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고군분투, 불길의 확산을 막기 위한 처절한 노력. 그래서 캐나다의 이 산불 현장은 결코 낯선 이국의 풍경이 아니었다. 멀린 전망대는 날 것 그대로의 상처를 보여주고 있었다. 반복되는 기후 재난 앞에서 우리나라 산림청도 전략적 복구가 아닌 생태계의 자연 회복을 선택했다. 환경단체, 생태학자들과 함께 국내 최초로 고운사를 자연 복원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97% 이상 산불 피해를 입은 천년고찰 고운사의 주지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과거의 모습에 집착하기보다, 현재 조건에서 가장 지혜로운 방식으로 숲을 재생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는 자연이 선택하는 새로운 숲의 모습을 기대한다"
불은 자연경관을 지웠지만, 브랜드의 본질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재스퍼의 멀린 전망대와 고운사의 자연 복원은 '회복의 브랜드'로 재탄생하고 있다. 잿더미 위에서 돋아난 새싹처럼, 현재의 상처를 미래의 가치로 전환하고 있다. 여기서 제안하는 마케팅 전략은 '포스트 크라이시스 브랜드 전략(Post Crisis Brand Strategy)'이다. 스토리로 재구성된 기억은 브랜드 자산으로 전환되어 새로운 방문 동기를 창출한다. 결국 관광은 소비가 아니라 복구와 재생에 동참하는 행동이 되고, 브랜드는 재난의 피해자가 아닌 회복의 주체로 자리잡는 것이다.

◆파커 릿지 트레일(Parker Ridge Trail), 총 6.4km, 약 3시간
아이스필드 파크웨이를 따라 밴프와 재스퍼 국립공원의 경계 부근에 자리하고 있는 파커 릿지 트레일. 이번 로키 트레킹 코스 중 길이는 가장 짧았지만, 그 안의 아름다움은 끝없이 길게 남았다. 도로변에서 시작되는 파커 릿지 입구는 넉넉하게 이어진 오솔길로 시작되는데 양옆으로는 울창한 숲이 길을 감싸고 있다. 안정적인 발걸음으로 마음을 사로잡는 트레일 헤드가 잊혀지지 않는 곳, 첫인상이 아름다운 트레일이었다. 그리고 잊지 않고 비가 또 내렸다. 이제 비는 로키를 만나기 위한 당연한 준비물이 되었다. 7월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천천히 오르다 보니 낮은 구릉이 눈앞에 펼쳐졌다. 알록달록한 야생화가 작은 밭을 이루듯 산허리를 풍성하게 채우고 있었지만 사방이 트인 탓에 바람이 거칠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바람의 목소리가 점점 커가고 좁고 아슬아슬한 길이 이어지면서 긴장이 계속되던 즈음, 저멀리 콜롬비아 빙원으로부터 흘러나온 사스카추완(Saskatchewan) 빙하지대가 보였다. 수백 년을 흘러내린 빙하가 산정 호수와 폭포, 아사바스카(Athabasca) 강을 형성하여 세월의 깊이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곳으로 로키 트레킹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광경이었다. 점점 피부에 와닿는 기후변화로 20년 내 사라질 수도 있다는 뉴스를 떠올리며 내 두 발의 수고로움이 찾아낸 보물인 듯 귀하게 바라보았다.
빙하지대가 나를 바라보는 포인트 옆 바위에 앉아 미리 준비해 온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지나가는 트레커들과 즐겁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때 한 그룹의 트레커들이 사진을 부탁했다. 흔쾌히 빙하지대와 반대편 안드로메다(Andromeda) 산과 호수가 잘 보이도록 찍어주었다. 그들이 독일에서 왔다고 했을 때, 나는 한국인이라 하자, "서울"에서 왔냐고 되물었다. "대구"라고 답하니 그 도시는 잘 모르겠다며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낯선 언어가 오가며 즐거운 웃음소리가 채워졌고 자연스럽게 함께 하산을 시작했다.
이 길이 이번 로키 트레킹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에 점점 더 걸음이 느려졌다. 그때 마멋(Marmot) 한 마리가 작은 바위에 엎드려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연신 사진을 찍어도 꼼짝도 안 하다가 내가 떠나려 하자 폴짝 뛰어 높은 바위에 올라섰다. 헤어짐이 아쉬운 듯 한참이나 하늘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던 마멋을 나는 작별 사진으로 받아들였다.
재스퍼 국립공원은 야생 동물의 천국이라고 말한다. 숲길과 호수, 도로에서 조우 했던 야생 동물들은 사람을 경계하지도 특별히 반기지도 않은 채, 자신의 길에 집중하고 있었다. 마치 재스퍼를 찾아온 손님들을 안전하게 지켜주듯이. 마찬가지로 이곳을 찾은 방문객들 또한 자연을 존중하며 길을 걸었다.

로키 트레킹 동안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사람은 볼 수 없었다. 모두가 가져온 것을 다시 가져가는, 자연을 존중하는 실천이 이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캐나다 공원청은 국립공원 입구와 트레일 안내판, 온라인 예약 페이지에 단지 '리브 노 트레이스'(Leave No Trace)라는 문장을 남겨두었을 뿐이다. 그러나 '버리지 않으면, 지켜집니다'라는 짧은 메시지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감성마케팅이 되었다. 책임감과 자긍심을 불러일으키는 문구가 로키 트레킹을 오래도록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태길 영남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경영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