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김혜령] 그들이 연주를 멈추면, 세상도 멈춘다

입력 2025-08-17 12:52:43 수정 2025-08-17 19:18:55

김혜령 바이올리니스트

김혜령 바이올리니스트
김혜령 바이올리니스트

"음악의 첫 소리는 지휘자가 아닌, 연주자 개개인의 손끝에서 시작된다." 바렌보임이 던진 이 한마디는 내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무대 위에서 수없이 연주하며 마주했던 순간이었다. 음악은 지휘자의 손끝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무대 위 모든 연주자의 숨과 손끝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자리를 지키는 제2바이올린이 있다. 무대 한쪽, 관객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그 자리에서 그들은 음악의 기초를 묵묵히 세운다.

나 역시 오케스트라에서 제2바이올린을 맡아 연주하던 시절이 있었다. 특히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를 연주할 때면, 솔직히 말해 1바이올린의 화려한 멜로디 라인이 부럽기도 했다. 그러나 연주가 시작되면 곧 알게 된다. 왈츠의 중심축은 제2바이올린이 만들어내는 끊임없는 리듬이라는 것을. 그 단순해 보이는 '둥-짝-짝'의 흐름이 흔들리면 무대 위 전체가 휘청거린다. 겉으로 드러나는 찰나의 화려함 뒤에는 묵묵한 리듬이 음악을 지탱하고 있었다.

제2바이올린은 단순한 조연이 아니다. 어떤 순간에는 1바이올린과 주선율을 나누며 중심에 서고, 또 다른 순간에는 하모니를 채우고 리듬을 받치며 음악의 숨은 뼈대가 된다. 주연과 조연을 오가는 멀티 플레이어이기에 제2바이올린은 오케스트라의 색채와 균형을 좌우한다. 청중의 시선은 잘 닿지 않지만, 그들의 음 하나하나가 곡 전체의 결을 만들고 흐름을 부드럽게 이어준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이 균형감은 연주자들조차 무대 위에서 은근히 의지하는 힘이 된다.

이 모습은 우리의 사회와도 닮아 있다. 회사, 가정, 학교, 지역사회 어디에서나 주목받는 자리는 일부에 불과하다. 나머지 대부분은 누군가를 빛나게 하는 자리, 혹은 필요할 때 전면에 나서는 자리다. 회의에서 조용히 기록을 남기는 사람, 보이지 않는 곳에서 행사를 준비하는 이들, 때로는 책임을 맡아 중심에 서는 사람…. 제2바이올린처럼 상황에 따라 뒷받침하다가도 필요하면 앞에 나서는 유연함이 세상을 움직인다.

화려한 멜로디만이 음악을 완성하는 것은 아니다. 주연과 조연, 중심과 배경이 끊임없이 자리를 바꾸며 한 곡이 살아난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무대 앞에 서든, 한쪽에서 활을 긋든,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음을 내는 순간 우리는 모두 세상의 한 부분을 연주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에 오케스트라를 보게 된다면, 무대 한쪽에서 묵묵히, 그러나 당당하게 활을 긋는 제2바이올린을 주목해보자. 그들의 연주는 조용하지만 음악의 흐름을 움직이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힘은 세상의 박자를 멈추지 않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