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호 포스텍 교수
내란 1주년을 넘기며 격동의 을사년 한해가 저물어간다. 그 무렵 민주평통 발대식이 일산 킨텍스에서 열렸다. 그런데 어떻게 선발했는지 모르나 22,000명 자문위원 중 세 사람을 뽑아서 발대식 중에 짧은 발표를 시켰는데, 그 중에 한 사람으로 내가 선정되었다. 사무처에서 전화를 주어 100초 발표 원고를 준비해 달라고 했다.
100초라..., 이런 발표를 흔히 엘리베이터 피치(Elevator Pitch)라고 한다.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는 동안 그 짧은 시간에 많은 내용을 다 담아서 전달해야 하니, 가장 어려운 발표다. 살아오면서 2시간 넘는 강연도, 30분도, 심지어 5분 스피치도 해본 적 있으나 100초는 처음이었다. 대통령 참석 행사라고 공무원들이 무척이나 신경을 쓰면서 그 전날부터 리허설을 3번이나 하게 했다. 원고를 써서 고치고 계속 줄여가는 작업이 무척 힘이 들었다.
행사장 인근의 호텔에서 하루 밤 자고 일어나니, 마음에 확신이 들었다. 함께 발표하는 다른 분들은 너무 긴장된 표정이었는데, 나는 이번 발표는 하늘이 주신 기회라는 생각에 마음이 오히려 담대해졌다. 30년간 내가 품어왔던, '청포도의 꿈'을 펼칠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거대한 행사장에 모인 청중은 과연 압도당할 만도 했다. 내가 언젠가 육해공군 장병 1만명 앞에서 6·25 특별 강연에 초청된 이후로 가장 큰 청중이었다. 1시간 행사의 끝 무렵, 이름이 호명되어 단상에 올라서니 바로 눈앞에 대통령을 비롯한 여러 장관들, 여야 국회의원 등 TV에서 만나던 많은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그 앞에서 분명한 어조로 내가 살아온 30년 인생을 담아서 전했다.
"안녕하십니까. 포항공대 교수 정진호 상임위원입니다. 저는 미국 유학 시절, 통일 없이는 진정한 독립도 없음을 깨닫고 통일을 위한 독립운동가의 삶을 제 소명으로 삼았습니다. 그 마음으로 북간도 연변과기대에서 10년간 동포들을 가르쳤고, 2003년부터는 평양과기대 설립 부총장으로, 다가올 남북 교류·협력 시대에 활약할 북한과 세계를 잇는 개방형 인재를 키워내고자 헌신해 왔습니다.
저에게는 '청포도(淸浦道)의 꿈'이 있습니다. 청진과 포항을 쇳물로 이어 길을 내는 꿈입니다. 포항에는 청진리가 있고, 청진에는 포항동이 있습니다. 유럽이 석탄철강공동체(ECSC)로 전쟁을 멈추고 마침내 EU 평화경제 시대를 열었듯이, 우리도 남북한 철강공동체를 통해 동아시아 평화경제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제 세계는 친환경 제철기술을 누가 선점하느냐에 따라 산업 질서가 재편될 것입니다. POSCO가 개발 운영중인 FINEX 공법과 수소환원제철법은 북한이 가장 주목하는 기술입니다. 무산의 풍부한 철광 자원을 바탕으로 청진에 남북이 함께 스마트 그린 제철소를 세운다면, 민족의 역사를 바꾸는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북한에 제철소를 세우는 것이 소원이셨던 故 박태준 회장님의 뜻과, '겨레의 슬기와 의지를 모아 통일과 중흥의 원동력 되자'고 POSCO 사가를 작사하신 박목월 시인의 예언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저는 다짐합니다. 우리 후대에게 분열과 적대가 아닌, 협력과 번영의 통일된 나라를 물려주기 위해 새 길을 열겠습니다. '쉬망 선언'을 통해 20세기 서유럽의 역사가 바뀌었듯이 21세기 동아시아의 역사를 바꿀 '재명 선언'이 필요합니다. 기회가 되면 각 분야 전문가들과 함께 준비한 이 '청포도 프로젝트'를 보고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를 비롯해 통일을 꿈꾸는 많은 과학자들이 민주평통과 함께 한반도 평화와 번영의 그 길에 매진할 것을 다짐합니다. 감사합니다."
중간에 박수가 4번이나 터져 나와 결국 100초를 훨씬 넘겼다. 그러나 대통령을 비롯한 청중들의 반응은 너무나 좋았고, 단상에서 내려올 때 마음에 기쁨이 넘쳤다. 마치 그 짧은 시간에 100층짜리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가 내려온 느낌이었다. 그 긴박한 순간, 내가 우리 민족의 하나됨을 위해 30대 초반 헌신하던 시절 가족을 이끌고 북간도와 평양에 들어가 그들과 더불어 살아온, 그리고 이제 결승선을 향해 마지막 스퍼트를 올리고 있는, 지난 30년의 세월이 빠른 속도로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많은 전화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만나자고. 바야흐로 때가 찬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