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의 흔적 품은 아련한 옛꿈 같은 도시
걸작 '카르멘'의 집필 영감 준 곳…'궁정풍 사랑' 시가 유럽에 영향
그림같이 아름다운 로마교 풍경
메스키타, 2만5천 명 수용 규모…화려한 내부 자랑 거대한 모스크
10세기 학자들 모인 문명 중심지
◆서늘하도록 슬픈 사랑의 기록들
1845년 프랑스의 고고학자이자 소설가인 프로스페르 메리메는 스페인 코르도바의 오래된 로마교(橋)를 걷는 집시 여인에게서 영감을 받아 소설 '카르멘'을 썼다. '사랑은 반항하는 새, 누구도 길들일 수 없지. … 사랑은 어린 집시 아이, 법이라곤 아는 게 없지. … 당신 주위에서 휙, 휙, 왔다가, 갔다가 다시 돌아오네. … 당신이 날 좋아하지 않으면, 되려 난 좋아져.'
1875년 35세 프랑스 청년 조르주 비제는 이 소설을 바탕으로 하바네라(Habanera)로 시작되는 오페라 걸작 '카르멘'을 썼다.
그러고 보면 코르도바는 촉망받던 군인 돈 호세가 자신을 떠나 투우사 에스카미요에게 마음을 옮긴 카르멘을 해치고 숨어든 산과 투우장이 있는 곳이다. '좋든 싫든 파멸적인 운명을 살게 되는' 집시 여인의 숙명을 지닌 것으로 작품에 그려진 카르멘은 돈 호세에게 마음이 식자 이를 감추지 않았을 뿐인데 어긋난 사랑은 두 사람을 비극적인 파국으로 데려다 놓는다. 서늘하도록 슬픈 사랑이다. 코르도바에는 카르멘과 돈 호세 외에도 구전되고 기록된 지독한 사랑이 또 있다.

1025년 후기 우마이아 왕조의 공주이자 시인이었던 왈라다는 칼리프였던 아버지가 암살당하자 문학 살롱을 열고 독립적인 삶을 살기로 했다. 이내 살롱은 코르도바 지성인들의 집합소로 발전하여 온 도시의 문인들이 몰려들었고, 그들은 그 살롱에서 낭만과 열정이 가득한 시들을 썼다. 공주 왈라다는 그 살롱에서 야심만만한 정치가 이븐 자이둔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데 하필이면 그가 아버지의 암살에 깊이 관련된 집안 남자였다.
이 비극적인 사랑의 결말 또한 파국을 맞는데, 그들이 남긴 슬픈 '궁정풍 사랑(courtly love)' 시가는 이후 피레네산맥을 넘어 유럽으로 널리 전해졌다. '우리는 초승달이오, 그 빛으로 밤의 그늘을 몰아내리라. 우리가 어디에 자리하든 영광이 있으리라. 운명이여, 반역자여, 어쩌면 네가 우리의 긍지를 앗아갈지도 모른다. 비록 운명이 우리의 절정을 빼앗을지라도 우리 영혼의 긍지만은 여전히 남으리라.' 시인 에즈라 파운드와 나니아연대기를 쓴 C. S. 루이스가 서구문학의 근간이 된 것이라 극찬한 시다.
문득 셰익스피어가 혹시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것은 아닐까, 단테에게도 아랍어, 라틴어, 베르베르어로 사랑, 낭만, 철학에 대한 무어인들의 아름다운 시가 영향을 끼쳤다던데, 혼자 상상하며 로마교를 걷는다. 기원전 1세기 아우구스투스황제 치세에 건설되었다가 8세기 재건되었다는 옛 다리 아래 과달키비르강은 조용히 흘렀고 강변엔 흐드러진 풀 더미와 허물어질듯한 수루, 강물을 퍼올렸을 낡은 수차가 수줍게 숨어있다. 어릴 적 본 이발소 그림 같다.

코르도바는 고대부터 켈트족과 이베리아인들이 거주했으며 페니키아와 그리스의 식민지를 거쳐 5세기까지 로마의 속주 히스파니아로 불렸다. 아, 폭군 네로황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가 코르도바 출신이라 어딘가 동상이 있다고 들었는데, 보진 못했다. 로마교 한가운데 도시 곳곳에서 보이던 코르도바의 수호천사 라파엘이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을 지그시 굽어보고 있다. 성상 아래 붉은 양초들이 꽃처럼 파란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

◆한 공간 두 개의 종교 양식, 메스키타 그리고 알 카사르
로마가 패망해 서고트족의 지배를 받던 코르도바는 711년 이슬람세력의 침략으로 점점 쇠퇴해갔다. 그때 이라크 압바스왕조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시리아 우마이야 왕족 아브드 알 라만 1세가 안달루시아로 피신해 왔고, 그는 곧 정치적 역량을 발휘해 756년 알 안달루스의 지배 군주(칼리프가 아니라 아미르)로 올라섰다. 코르도바는 그 수도가 되었다.
'쿠라이시의 매'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던 그는 '루사파궁 한가운데 보이는 야자수 한 그루, 본향에서 멀리 떨어져 서쪽 땅에 있다네. 고향을 떠난 너의 나그네 신세, 우리 백성, 내 가족과 멀리 있는 나와 같구나. 비구름이 비로 내려 외로이 서 있는 너를 흠뻑 적셔주기를.'란 시가도 남길 만큼 용감했고 낭만적이면서 신실한 지배자였다.
그는 곧 시내 중심부에 있던 성 비센테 성당을 기독교인들에게 구입해 허물고 바그다드에 뒤지지 않을 대규모 모스크인 메스키타를 짓기 시작했다. 이후 800여 년 동안 코르도바는 이슬람세력 무어인들 즉 아브드 알 라만 1세 후계자들에 의해 번성해갔다. 메스키타는 몇 차례 확장돼 2만5천명 수용 규모의 거대한 모스크로 커져 남북 180m, 동서 130m에 이르렀다. 이 건물은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메스키타 내부는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석영, 벽옥, 대리석, 화강암 등으로 만든 가늘고 둥근 기둥이 흰 석재와 붉은 벽돌을 교대로 조합한 850개 이중 말굽형 아치는 마치 숲의 보석상자 같았다. 벽면 모자이크와 벌집형 천장과 별 모양 박공 또한 섬세하기 그지없다. 아라비안 나이트, 알라딘의 요술램프를 읽으며 상상했던 보석이 주렁주렁 매달린 나무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관람객들이 메스키타 뒤뜰, 오렌지가 환한 백열등처럼 주렁주렁 달린 나무들을 보곤 모두 환성을 지르고 있다.
10세기 코르도바는 인구 50만, 도서관 80곳에 장서 40만권이 비치되어 주변국 학자들이 과학, 의학, 철학을 배우려고 모여들었다. 수십 개의 성문과 수백 개의 목욕탕이 즐비한 코르도바는 바그다드에 비견되는 문명 중심지로 '세계의 보석'이라 일컬어졌다. 그러나 곧 정치적 혼란기가 시작되어 1031년 코르도바 칼리프 체제는 종말을 맞았고, 1236년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3세가 코르도바를 정복하여 이 지역은 기독교권이 되었다.
메스키타는 부분적 변형을 피할 수 없었다. 중앙 일부분을 부수어 마리아에게 바치는 제단과 십자형 성가대석을 설치하고, 사방 벽을 따라 소성당을 세웠으며, 이슬람식 뾰족탑 미나레트 대신 가톨릭식 종탑이 세워졌다. 이렇게 메스키타는 현재의 '한 공간에 두 개의 종교 양식이 공존하는' 독특한 건축물이 되어갔다.
메스키타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알 카사르는 후기 우마이아왕조가 왕궁 겸 요새로 짓기 시작했지만 완성 전 스페인에 정복되어 1328년 알폰소 11세에 의해 잔존한 무어인들이 완공시켰다.

스페인 전역의 알 카사르 중 가장 아름다운 물의 정원을 가진 곳으로 유명한 이곳에 이사벨라와 페르난도왕이 머물며 레콩키스타(Reconquista, 스페인 재정복 운동)를 지휘하면서 1492년 마지막으로 그라나다를 함락, 무어의 마지막 왕 보압딜을 이곳에 감금시켰다. 정원에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위해 첫 항해를 떠나기 전 두 왕을 알현하는 석상이 있다.
천 년의 시간이 꿈처럼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코르도바에서 어릴 적 계몽사판 컬러 동화책 '오렌지꽃 피는 나라'와 신밧드가 타고 날던 양탄자를 다시 떠올린다. 깨어나고 싶지 않은, 폭죽 터지는 백일몽을 꾼 듯한 오래된 코르도바의 날들, 몇 번이고 다시 가고 싶은 아련한 옛꿈 같은 도시가 그곳이다.

박미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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