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형 산불·이상기후 버텨낸 농민들, 이젠 정부 통상카드에 '직격탄' 위기
"정부가 미국산 사과 수입을 통상 협상 카드로 꺼내든다는 말에 밤잠을 설쳤습니다. 이건 단순한 과일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삶이 걸린 문제입니다."
지난 12일 오전 경북 청송군 부남면의 한 사과밭. 35℃에 가까운 폭염 속에서도 농민 A(64) 씨는 사과나무 아래 그늘을 찾아 손수 끼니를 해결하고 있었다. 올해 봄 대형 산불로 인근 농장이 잿더미가 됐고, 냉해와 우박 등 이상기후로 낙과 피해까지 겹쳤지만 그는 다시 일어섰다. 그런 그에게 이번 '미국산 사과 수입 검토' 소식은 무엇보다 치명적이다.
"인건비·비료·농자재 다 오르고, 해마다 예측 못 하는 날씨에 시달리는 데 이제는 값싼 외국 사과까지 들여온다고요? 우리 보고 그만하라는 얘기죠."
A씨는 미국산 사과 수입이 결정 나면 평생 일군 사과나무를 모두 베어버릴 계획이다. 더 이상 힘들게 사과나무를 키울 이유기 없기 때문이다.
청송은 사과로 먹고사는 고장이다. 전국 사과 생산량의 62%가 경북에서 나며, 이 중 상당수를 청송·영주·안동이 책임진다. 청송군만 해도 약 3천여 농가가 사과를 주요 소득원으로 삼고 있다. 2023년 기준 경북 전체 사과 생산액은 8천247억원에 달한다. 단일 품목으로는 지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절대적이다.
이 때문에 정부의 미국산 사과 수입 추진 움직임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것도 이들 지역이다.
경북도의회는 앞서 9일 "과수 농가를 절벽 아래로 내모는 행위"라며 즉각 반발했고, 청송군의회는 하루 뒤 "정부가 끝내 농민의 목소리를 외면한다면, 행동으로 옮길 수밖에 없다"며 성명을 냈다.
정부가 미국산 사과 수입을 꺼낸 이유는 한미 통상 협상 때문으로 알려졌다. 산업통상자원부가 농림축산식품부에 협상 카드로 미국산 사과 수입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국내 시장 개방 확대를 요구하는 미국 측 압력에 따른 대응이다.
하지만 농민들은 통상 논리가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다고 호소한다. 특히 사과는 저장성과 유통성이 뛰어나 외국산이 국내 시장을 빠르게 잠식할 수 있는 품목으로 분류된다. 이미 뉴질랜드산 키위와 호주산 체리 등에서 보듯, 수입 과일은 유통망만 확보되면 가격 경쟁력으로 국내산을 압도하기 쉽다.
심상휴 청송군의장은 "미국산 사과가 수입되면 대형마트, 급식 시장부터 국내산 밀어내기 시작할 거다. 그러면 도매단가부터 무너지고, 결국엔 문 닫는 농가가 속출할 것"이라며 "이건 단순한 시장 경쟁이 아니라 생존 전쟁"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미국산 사과의 수입이 현실화될 경우, 초기엔 시장 반발을 우려해 제한적 도입으로 보이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국내 과수 산업의 기반 자체를 흔들 수 있다고 경고한다.
농업분야 한 전문가는 "수입 개방은 한번 문이 열리면 되돌리기 어렵다. 그 피해는 가장 약한 고리인 농민들에게 집중된다"고 말했다.
정부는 아직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았지만, 지역 정치권과 농민단체들은 이미 대응 수위를 높이고 있다. 청송군의회는 ▷수입 검토 즉각 중단 ▷농산물의 통상 협상 대상 제외 선언 ▷농업 희생양 삼지 않겠다는 입장 발표 등 3대 요구사항을 정부에 전달한 상태다.
최근 청송 한 사과밭에서 만난 80대 농민은 "50년 넘게 사과 농사를 지으며 자식 공부시키고 장가·시집보내고 이제 우리 병원비를 이 사과 한 상자가 책임지고 있다"며 "사과가 수입되면 지금의 일상이 모두 무너지는 것"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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