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수상작] 달밭 / 반충환

입력 2025-07-07 06:30:00 수정 2025-07-07 09:28:06

2025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부문 당선자 반충환 님.
2025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부문 당선자 반충환 님.

어린 시절 고향 동네에는 기차역이 있었다. 5월이면 하치장에는 석탄 더미가 낙타 등허리같이 쌓이고 석탄 화차가 등짐을 지고 밤을 지새운다. 어둠이 가셔진 여명의 석탄 더미에는 새벽별이 점점이 내려앉고, 빨간 해가 솟으면 낙타 등으로 떨어지는 햇빛이 밤새 내려앉은 이슬하고 부딪치면서 거울 쪼가리를 뿌려놓은 거 같이 반짝인다. 기차 통학하는 중고등학생들이 개찰구를 와글와글 쏟아져 나가고 나면, 담배 농가 건조실에 땔 석탄 나르는 탄차가 온종일 석탄장을 뻔질나게 드나든다.

역전 앞 우리 집 뒤꼍 너른 밭 건너로는 아카시아꽃이 빽빽하게 핀 산자락 낭떠러지가 병풍처럼 펼쳐있고, 그 너머에는 고모 사는 동네 달밭이 있었다. 뒷마을 고모네 집 가는 길목에는 서낭고개가 있었는데 저녁나절만 돼도 혼자서는 넘기 섬뜩했다. 역전에서 불과 전봇대 너덧 개 놓일 정도의 거리인데 거기부터는 전기가 안 들어갔다. 즐비하게 늘어선 거뭇한 참나무가 눈을 부라린 장승 같았고, 노랑 파랑 하양 빨강 천이 그 나뭇가지에서 펄럭거렸다. 소달구지 하나만치의 좁은 서낭고갯길이 가른 왼쪽으로는 곰 등허리 모양으로 우뚝 솟은 토성土城 둑이 고개 너머 마을 따라 내려갔고, 오른쪽으로는 질그릇 굽는 옹기가마가 마을 쪽에서 고갯마루까지 꿈틀거리는 용의 등허리마냥 웅장하게 뻗어 올라왔다.

성둑에 올라서면 그 끝자락에 달처럼 동그랗게 자리 잡은 달밭이 내려다보인다. 달밭은 달 없는 밤엔 안 뵈는 옹기쟁이들이 사는 동네다. 옛날 천주교회가 박해받던 때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신앙을 지키며 옹기를 굽던 천주교인 후손이 대부분인 마을이다. 달 뜬 밤엔 숨은 달빛 하나 없이 환하게 내려앉은 초가지붕이 저마다 하얀 박을 안고 있고, 멀찍이는 달 아래 비늘을 쪼개면서 흐르는 개울이 눈에 들어온다.

달뜬 밤이면 달밭에 사는 애들은 옹기장의 깨진 항아리 조각을 엉덩이에다 깔고서 곰 등짝처럼 널따랗게 늘어진 성둑 깡비탈을 내리 탔다. 나는 서낭고개가 무서워 얼씬 못하다 애들 노는 소리가 들리면 그제야 올라갔다. 나도 따라 내리꽂히듯 옹기쪼가리를 타면서 옴짝옴짝 오줌 지린 잠지 끝을 검불 터는 척 조몰락거리며 달 가는 줄 몰랐다.

옹기가마에 불 들일 때는 하늘 향해 치켜든 가마 화구 끄트머리까지 불길이 치솟는다. 깜깜한 밤 가마 끝에까지 들락거리는 시뻘건 불기운은 그야말로 볼거리였다. 그걸 보면서 애들은 용 아가리에 혓바닥이 날름대는 거 같다고 했다. 불길이 꺼지고 나면 가마 화구가 뿜어내는 꺼먹연기가 하늘로 치솟는다. 세차게 기둥처럼 솟는 새까만 연기는 올라가다 넓게 퍼지면서 달을 가렸다가 말았다가 하고, 달을 지나 까마득한 별까지 꼬불꼬불 뭉게뭉게 끝도 없이 올라간다. 애들은 목을 뒤로 젖히고서 하늘로 올라가는 용 꼬리가 저렇다느니, 아니라느니 저 연기는 비 오는 먹구름이 된다느니 떠들어 댔다.

전기도 안 들어간 달밭에 사는 애들은 하얀 달이 있는 밤엔 야고보야, 비오야, 마지아야, 성당에서 부르는 이름을 저희끼리 불러가며 늦도록 성둑에서 놀다가, 화물기차가 올빼미 눈깔 같은 불을 켜고 먼 마을 능陵모랭이 모퉁이서 기적을 울리면 그제야 집으로 내려갔다. 달 없는 밤엔 애저녁에 어둔 방에 틀어박혀 곰 등짝도 꾸길 듯하던 아우성은 옹기종기 초가지붕 하얀 박에 눌리어 달빛마냥 고요했다.

삶을 좇고 오니 사십 년이다. 분주하던 기차역도 옮겨갔다. 석탄 무더기도 통학생도 탄차도 모두 사라졌고, 우리 집터 너른 땅엔 관공서가 밀고 들어섰다. 달밭에 초가지붕을 비추고 문틈 새 방 안을 엿보던 달빛은 여전한데, 섬뜩하리만치 으슥하던 서낭고개도 장승 같은 참나무도 나뭇가지에서 펄럭이던 오색천도 성둑도 옹기가마도 다 뭉개지고 흔적조차 없다. 멀찍이 달빛 개울도 깡비탈에 퍼지던 아우성도 세월에 떠밀려 갔다. 밤이 깊었으니 그만 놀고 집에 들어가라는 기적 소리도 떠나갔다. 옹기쟁이도 홍두깨로 밀은 칼국수에 애호박 고명을 얹어주던 고모도 옹기가마 꺼먹연기 쫓아 하늘로 갔다. 그 자리엔 네모나게 솟은 집에 낯선 얼굴들만 가득하다. 자연석은 다듬을수록 아름다움을 잃는다더니! 서운한 마음에 달밭을 애써 뭉개고 돌아서는데 노란 달만 애꿎게 총총 따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