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총연맹 대구지회 고문
어느덧 6·25 전쟁이 발발한 지 75년이 되었다. 전쟁의 포성은 멈췄지만, 그 상처와 교훈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1950년 6월,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은 서울이 불과 사흘 만에 함락되는 등 절체절명의 위기로 치달았다. 그야말로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기였다. 그러나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한 수많은 이들의 피와 땀이 모여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특히 영남 일대에서는 남하하는 인민군을 저지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포항, 안강, 영천, 창녕, 다부동 등지에서 국군과 연합군은 방어선을 형성했고, 이 일대 전투는 대한민국을 지키는 마지막 방패였다.
그 가운데 유독 기억에 남는 전투가 있다. 바로 '장사상륙작전'이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과 동시에 시작된 이 작전은 북한의 보급로를 교란하고 병력을 분산시키기 위한 전략적 작전이었다.
이 작전의 주역은 정규군이 아닌 학도병 중심의 독립 제1유격대대였다. 평균 나이 17세, 교복 입은 학생들이 대구에서 편성돼 장사 해안으로 향했다. 태풍 '케지아' 속에서 시작된 상륙은 가혹했다. 상륙정에서 내리자마자 인민군의 집중사격이 쏟아졌고, 바다를 건너 해변에 닿기도 전에 수많은 병사들이 희생되었다. 단 하루 만에 수십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는 피해를 입었고, 고지를 향한 첫걸음부터 피로 물들었다.
해변에 도착한 이들은 삽조차 없이 맨손으로, 손가락으로 모래를 파며 참호를 만들었다. 손톱이 빠지고 손바닥이 터져가면서도 몸을 숨기며 싸웠고, 4시간의 치열한 접전 끝에 200m 고지를 탈환하며 초기 상륙에 성공했다.
하지만 병력과 장비가 턱없이 부족했던 유격대는 이후 5일간 이어진 교전에서 다수의 전사자와 부상자, 포로와 실종자를 내고 결국 철수했다. 총 772명의 유격대 중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39명이 포로로 잡힌 것으로 전해진다. 실종자도 수십 명에 달한다.
이처럼 장사상륙작전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이끈 숨은 공로자이자 위대한 희생이었다. 학도병들의 순결한 희생이 만들어낸 기적 같은 성공의 밑바탕이었다. 조국을 지키겠다는 의지 하나로 바다를 건너 피를 흘린 이들이 없었다면, 인천의 승리도 결코 보장될 수 없었다.
"누군가는 희망을 쏘기 위해, 절망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장사상륙작전은 바로 그런 전투였다.
우리는 그 희생을 기억하고, 그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 포항, 안강, 영천, 창녕, 다부동에서 흘린 피는 단지 지역을 지킨 것이 아니라, 오늘의 자유 대한민국을 만든 자양분이었다.
오늘 우리가 편히 숨 쉴 수 있는 이유,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할 이름들을 가슴 깊이 새기자. 물에 젖은 교복 바지로 총을 든 학도병들, 포탄 속에서 조국을 지킨 군인들, 고향을 향한 발걸음을 막아선 국민들의 이름을 기억하자.
그들을 기억하는 일이 곧, 오늘의 우리를 지키는 일이다. 75년이 지난 지금도 국제 정세는 요동친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어떤 위기 속에서도 민족의 생명줄을 지켜내는 건 결국 '기억하는 힘'이라는 것을.
그날 영남을 지켰던 이름 없는 병사들, 학도병들, 시민들의 희생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자유를 누리는 대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경의를 표하며 머리 숙여 추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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