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갤러리 대구점 큐레이터
우리는 '이것도 미술인가'라는 질문이 더 이상 새롭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다. 바나나를 벽에 붙이고, 일상의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며, 전시장에서 음식을 나눠 먹으며 관객을 참여시키는 작품들은 더 이상 놀라움을 주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를 공유하는 동시대 미술(Contemporary Art)은 이미 형식의 경계, 주제의 중심, 창작자의 고유성마저 흐리며 스스로의 정의를 해체해왔다.
오늘날은 '동시대'라는 말 자체가 불안정한 시간 개념 위에 서 있다. 20세기 중반 이후 모더니즘을 넘어 포스트모더니즘의 흐름 속에서 '동시대 미술'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정치적, 사회적 이슈에 반응하고, 고정된 장르 대신 유동적인 형식을 지향하며, 때로는 관객과의 관계 자체가 작품이 되는 경향으로, 이는 시대적 구분이라기보다는 세계를 대하는 태도를 의미 하는 듯하다.
비평가 테리 스미스(Terry Smith)는 동시대 미술을 '하나의 사조가 아니라 서로 다른 시대와 가치가 병렬적으로 공존하는 미술'이라 설명했다. 실제로 오늘날의 미술 경향들은 하나의 기준으로 묶기 어렵다. 정체성, 기후 위기, 기술 변화, 사회적 갈등 등 서로 다른 주제들이 전시장 안에서 동등하게 놓인다. 어떤 작가는 브러시 대신 알고리즘을 사용하고, 어떤 전시는 벽 대신 스마트폰 속에서 작품을 전시한다. 미술이 세상을 반영하듯, 동시대 미술은 혼란스럽고 빠르게 변하는 오늘의 감각을 닮아 있다.
그렇다면 이 동시대 미술은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단지 하나의 사조의 소멸을 묻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동시대'를 어떻게 정의하고 경험하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이다. 사실 '끝'이라는 개념은 예술에서 그리 명확하지 않다. 과거의 미술 사조들은 종종 시대의 변화나 이념적 전환에 따라 새로운 흐름으로 대체되었지만, 동시대 미술은 애초에 명확한 경계나 형식을 가지고 출발하지 않았다.
지금의 예술은 경계 없이 즉각적이고, 감정적이며, 유동적인 의미망으로 작동한다. 하나의 사조가 아닌 수많은 '개인의 동시대성'이 병렬적으로 공존하는 지금, 동시대 미술은 하나의 시대라기보다 플랫폼화된 감각의 흐름에 가깝다. 그것은 끝나는 개념이 아니라, 계속해서 갱신되고 변형되는 감각의 지도이다. 동시대 미술은 시대를 반영하는 '감각'이며, 우리의 현재를 재료로 만들어지는 끝없는 과정이다. 오히려 끝을 상상하는 순간, 이미 우리는 새로운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동시대 미술의 끝은 우리가 '지금'이라 부르는 감각이 바뀌는 순간, 다시 이름 붙여질 또 다른 현재가 등장할 때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 또한 단절이 아닌 이 흐름의 끊임없는 갱신 속 연속선 위의 진화일 것이다. '동시대'라는 말이 모호한 것처럼 그 끝 역시 모호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술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을 붙잡고 있고, 동시대 미술은 그것을 가장 가까이에서 반영하는 거울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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