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의 기록여행] 선거에 친일파·모리배 수두룩

입력 2025-05-29 10:45:02 수정 2025-05-29 20:02:25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50년 3월 15일 자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50년 3월 15일 자

'입후보자여! 반성하라 입후보 제군은 국회의원의 의무를 생각하여 보았는가. 목하에 보이는 몇 가지 조건으로 경고하려 한다. 선전비의 남용을 삼가라. 선전만 하면 된다고 봉건 유산 소유자, 왜정시대 부일 협력자, 해방 이후 신흥 모리배 등의 자본계급만이 출마하고 독립을 위해 헐벗고 굶주리는 애국 투사는 1인도 출마하지 못하는데 양심의 가책이 없는가.'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50년 3월 15일 자)

국회의원선거를 두 달여 앞두고 출마자의 세평이 나돌기 시작했다. 돈으로 선거운동을 하는 입후보자들이 도마 위에 올랐다. 일제에 붙어 협력한 부일 협력자, 봉건 유산자, 신흥 모리배들이었다.이들은 일찍이 건국 도상의 훼방 세력으로 꼽혔다.

반면에 일제와 싸우던 애국 투사의 출마는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헐벗고 굶주리다 보니 출마 여력조차 없었던 걸까. 정작 독립된 나라의 일꾼을 뽑는 선거에 독립투사들이 홀대당하고 말았다. 이런 선거판에 과거를 세탁하려 출마하는 후보들이 수두룩했다. 여기저기서 탄식이 나올만했다.

거짓말을 일삼아 선거판을 혼탁하게 하는 후보들 역시 적잖았다. 위조 정견을 발표하는 후보들이었다. 유권자에게 자신의 행적과는 동떨어진 속임수 발언을 밥 먹듯이 했다. 누가 봐도 지키지 못할 헛된 공약도 마찬가지였다. 경제 균등을 내세우며 출마한 후보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익만을 취하는 모리배 회사의 중역이었다. 또 첩을 둔 한 후보는 남녀평등을 소리높여 외쳤다. 심지어 소속 정당이 대중으로부터 외면을 받게 되자 하루 만에 안면을 싹 바꿔 무소속으로 위장 출마하는 후보도 있었다.

선거를 신분 세탁, 권력장악의 방편으로 삼으려는 시도는 해방 직후부터 시작됐다. 해방된 그해에 행정 고문회의 민선 고문 선거가 있었다. 행정 고문회는 각도나 부·읍·면 등에 설치되었던 민·관 조직이었다. 해방 다음 달부터 우리 땅에 주둔한 미군은 애초 행정 요직에 일본인을 그대로 뒀다.

일본 관리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이에 해방된 나라의 조선 민중들은 불만이 고조됐고 미군은 주민 의견을 수렴한다며 행정 고문회를 설치했다. 이 가운데 민선 고문은 선거로 뽑았다.해방 후 첫 선거였던 민선 고문 선거에는 부일 협력자들도 출마했다. 친일 행적이 뚜렷한 당선자가 나왔고 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됐다.

경북도의 민선 고문 당선자 중에도 누구나 알만한 부일 협력자들이 있었다. 해방되는 그날까지 일본 신사를 보호하라고 부르짖으며 일제에 충성했던 인물이었다. 이들은 일제에 정신을 맡겼다가 곧바로 조국을 위해 일하겠다고 돌변했다. 일본 순사로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며 동포들을 괴롭혔던 당선자도 있었다. 이런 후보들이 선거기간 돈을 뿌리며 당선되었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친일파 당선자들은 이런 비판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되레 일제 치하에 밥 안 먹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항변했다. 살기 위해 일제의 명령에 따랐던 만큼 잘잘못을 따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눈 딱 감고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주장을 펴기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반응은 거센 역풍을 불러왔다. 새 국가건설을 위해서는 과거의 잘잘못을 짚어야 한다는 당위성이 되레 커졌다. 일제 앞잡이였던 사람들은 선거 출마 대신 반성하고 물밑에서 건국의 조력자 역할을 하라는 경고였다.

친일파와 모리배 등이 이렇듯 아무렇지 않게 공직에 진출하자 사람들은 분노했다. 조선말을 하고 조선 옷을 입는다고 죄를 묻는데 앞장섰던 사람들, 일본이 일으킨 전쟁터의 강제 동원에 나섰던 사람들,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동포들에게 가혹한 짓을 일삼던 사람들. 이들은 최소한 공직에 나서서는 안 된다고 봤다. 일제 잔재의 인적 청산이었다. 선거를 통해 민족의 정기를 되찾고자 했던 염원이었다.

선거가 민주주의 작동의 기틀이라는 인식은 그 시절에도 같았다. 애국 투사 후보는 없더라도 사사로운 정이나 특정 정당, 금전 등에 구애되지 않는 투표를 권했다. 나라를 팔아먹어도, 민주주의를 짓밟아도 분만 살짝 바르고 선거판에 나서는 후보들에 대한 일침이었다. 나흘 뒤면 대통령 선거다.

박창원
박창원

박창원 경북대 역사문화아카이브연구센터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