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황영은] 개똥, 그 하찮은 것들의 가치

입력 2025-05-29 09:23:00 수정 2025-05-29 15:06:08

소설가

황영은 소설가
황영은 소설가

러시아의 소설가 톨스토이는 1885년에 '바보 이반'이라는 민간 동화를 발표했다. 선함과 성실함의 가치를 주제로 하고 있는데 욕심과 탐욕에 눈먼 형들은 파멸하고, 우둔하지만 정직한 막내 이반이 결국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고 올바른 삶을 살게 된다는 교훈적인 내용이다.

권선징악, 땀 흘려 일하는 성실의 위대함, 권력이나 돈보다 지혜와 행복의 추구 같은 주제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지향해야 한다고 늘 배워왔고 또 다음 세대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는 보편적인 가치이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만은 대체로 다루지 말아야 할 진부한 소재이다. 그 가치를 깎아내려서가 아니라 기존에 없던 새로운 것을 좇는 문학의 장르에서, 인류의 시작과 함께 끝없이 추구해 왔을 보편적인 가치를 굳이 언급할 필요까지 없다는 말이다. 비유를 들자면 '앵두 같은 입술'처럼 식상한 주제가 독자들에게는 하찮게 여겨질 수도 있다는 맥락.

과거 어른들은 태어난 자식의 아명으로 흔히 '개똥이'를 붙이기도 했다. 사실 나 또한 아직도 우리 집에선 개똥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다. 개똥밭에 시집 보내라. 증조할머니는 나를 두고서 종종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가 아주 어릴 적, 결석한 동네 친구의 숙제장과 우유를 전해달라는 유치원 선생한테 왜 그래야 하냐면서 대들고 온 날이 있었다. 여자애가 저토록 기가 센데 어느 집에서 좋다고 데려가겠냐고, 제 성정에 굽히고서는 못살 팔자 같으니 개똥 굴러다니는 아무 집안에나 시집 보내서 떵떵거리고 살도록 하는 게 순리일지도 모른다는 증조모의 뜻이었다. 봉건적 틀에 갇혀 살다 간 옛 어른의 서툴고 에두른 사랑의 표현이었음을 이제는 알고 있지만, 과거에는 왜 '개똥이'고 '개똥밭'인지 불쑥 화가 나기도 했었다.

요즘은 산책하는 반려견의 변을 모두 수거해가야 하지만 과거에 개똥은 길거리에서 그냥 나뒹구는 하찮은 존재였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일지언정 그래도 튼튼히 구르다가 돌멩이처럼 땅속에 붙박였을 것이다. 출산 환경이 열악했건 과거에 아이의 건강한 유년을 기원한다는 의미에서 또한 '개똥'이라는 아명을 갖다 쓴 것도 잘 알고 있다.

소설에서는 지양해야 할 소재라지만 '개똥'의 굳건한 생명력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경쟁 구도, 자본의 논리가 철저한 구조 속에서 호흡하는 우리에게 그 흔해 빠진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일이 절대로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찬물 같은 진리를 모두 다 피부로 느끼면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마의 술수에 배탈이 나도 바보처럼 넓고 딱딱한 밭을 계속 쟁기질하는 이반의 아둔함을 괄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 하찮은 것들을 추구하며 지탱하는 삶이 마침내 우리 생을 올바르게 이끌어주는 주춧돌이거나 치트 키라는 진실을,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개똥처럼 받아들이면 그걸로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