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교황 예술 순례] <4>바티칸과 르네상스의 거장들

입력 2025-05-27 11:45:03

박미영 시인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바라본 피렌체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바라본 피렌체
라파엘로
라파엘로

1503년 이탈리아 우르비노의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da Urbino, 1483~1520)는 피렌체로 갔다. 약관(弱冠) 20세, 당시 피렌체공화국의 실세였던 마키아벨리가 주도해 베키오궁전 회의실 벽화를 다 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1452~1519)와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1564)가 그린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위대한 자(Il Magnifico)' 로렌초 데 메디치가 1492년 사망한 뒤 피렌체는 극도의 혼란기를 맞았다. 그의 장남 피에로는 애초부터 아버지의 뒤를 이을 그릇이 아니었던 터라 샤를8세의 침공과 피렌체 시민들 지지조차 받지 못하고 쫓겨나 유럽을 떠돌다 그해 사망했다.

피렌체는 르네상스와 메디치가를 혐오하던 종교개혁가 사보나롤라가 유일 지도자가 돼 그리스도교공화국을 선포하고 광기 어린 신정(神政)을 펼쳤다. 그러나 곧 대립하던 부패한 성직자와 세속교황 알렉산데르6세의 함정에 빠져 화형 당해 피렌체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그 정치 공백기에 마키아벨리가 민심 수습 차원으로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에게 베키오궁전 벽화를 맡긴 것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들은 한 벽에 같이 벽화를 그려야한다는 것을 몰랐다.

당시 아버지뻘인 다 빈치는 51세, 아들뻘인 미켈란젤로 28세였다. 이미 다 빈치는 밀라노 산타마리아델레 '최후의 만찬'으로 어마어마한 명성을 누리던 중이었고, 미켈란젤로는 '피에타'와 '다비드'로 폭발적인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던 때였다. 이 대결은 역시 정치가 마키아벨리의 의도대로 온 유럽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라파엘로는 유복한 궁정화가의 아들로 태어나 뛰어난 그림 실력에 준수한 용모, 완벽한 예절과 성실, 겸손까지 갖춰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젊은이였다. 피렌체에서 그는 두 대가들을 만나 그들의 작품을 수없이 모사하고 연구해 다 빈치의 스푸마토기법과 미켈란젤로의 인물 역동성을 자연스럽고 우아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나갔다. 르네상스 세 천재는 그렇게 만났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

다 빈치가 앙기아리전투를, 미켈란젤로가 카시나전투를 그리기로 한 베키오궁전의 벽화는 완성되지 못했다. 피렌체의 홀대에 분노한 다 빈치가 프랑스 왕 루이12세의 부름을 받자 밀라노로 떠났고, 고대 로마의 영광을 부활하려는 교황 율리오2세의 부름을 받은 미켈란젤로가 천지창조를 그리기 위해 바티칸으로 떠났기 때문이었다.

벽화 밑그림은 루벤스 등의 모사 드로잉으로 남았고 나중에 '예술가 열전'을 쓴 바사리가 마르치아노전투로 미완성작들을 덮어 그렸다. 라파엘로 또한 성베드로성당 초대 건축책임자인 브라만테의 천거로 곧 바티칸의 부름을 받아 로마로 갔다.

율리오 2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여할 만큼 워낙 불같은 성격에 황소고집이었다. 비슷한 성격인 미켈란젤로와는 마찰이 잦았지만 라파엘로가 '서명의 방(1530년경 바사리가 붙인 이름)' 프레스코화 일부를 그려보이자 즉시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사도궁전 네 개의 방 기존 그림들을 모두 파기시키고 새로 그리게 할 정도로 총애했다. 네 개의 방은 바티칸에 가면 필히 관람해야 할 일명 '라파엘로의 방(Stanze of Raphael)'들이다.

가장 유명한 '서명의 방' 사면 벽은 ▷아테네 학당(철학) ▷성체 논쟁(신학) ▷파르나소스(시) ▷정의(법학)를 형상화했다. 천장화 둥근 원에는 그 사면 벽을 의인화한 여신들이, 네모 틀엔 각각 천지 창조, 아폴론과 마르시아스, 아담과 이브, 솔로몬의 재판이 그려져 있다.

특히 '아테네 학당'은 아폴론, 아테네 등 이교의 신들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등을 비롯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 조로아스터, 프톨레마이오스 등 기독교에서 배척하던 이교도 등 60여 명이 그려졌다.

역대 교황들의 거주, 집무공간인 바티칸 사도궁.
역대 교황들의 거주, 집무공간인 바티칸 사도궁.
라파엘로의 방. 바티칸 미술관 제공
라파엘로의 방. 바티칸 미술관 제공
라파엘로의 방. 바티칸 미술관 제공
라파엘로의 방. 바티칸 미술관 제공

고대와 그리스도교 지식의 조화를 이루어내는 혁신적인 이 묘사는 당시 율리오2세의 라파엘로에 대한 지지와 르네상스에 대한 전폭적인 수용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그때 미켈란젤로는 '재창조'에 능한 라파엘로에 대한 일종의 질투에 가까운 경멸과 강박증으로 시스티나성당의 작업을 꽁꽁 숨겼는데, 브라만테가 몰래 열쇠를 내 줘 밤마다 훔쳐보았던 듯하다. 라파엘로는 1511년 대중에게 공개된 '천지 창조'를 본 뒤 경외감을 느껴 '아테네 학당' 밑그림에 없던 헤라클레이토스를 그의 얼굴로 새로 그려 넣었다.

'헬리오도루스의 방'은 교황의 알현실로, 1510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한 율리오2세의 의지에 따라 '교회의 승리'라는 주제로 그려졌다. 역시 출입문과 창들을 절묘하게 배치해 '볼세나의 미사' '감옥에서 구출되는 베드로' '레오와 아틸라의 만남' '헬리오도루스의 추방'으로 네 벽을 장식했다. 1513년 율리오2세가 선종했고 뒤를 이은 레오10세(조반니 데 메디치)의 신임은 더 두터웠다.

'보르고 화재의 방'을 착수할 때 이미 라파엘로는 속된 말로 죽을 시간도 없을 만큼 바빠진 유명 인사가 돼있었다. 더군다나 로마의 아름다운 여인들은 그를 그냥 두지 않았고, 거절에 능하지 못해 일은 늘 과부하 상태였다. 설상가상 브라만테마저 사망해 성당 재건축마저 수행하게 됐다. '보르고 화재'는 라파엘로 혼자 완성했지만 '카롤루스의 대관식', '오스티아 전투', '레오 3세의 선서'는 제자들과 함께 그렸다.

박미영 시인
박미영 시인

그는 '콘스탄티누스의 방'을 스케치와 구상만 해둔 채 1520년 급사하고 말았다. 향년 37세, 그 짧은 시간에 3천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그의 바램대로 판테온에 묻혔으며 묘비명은 추기경 벰보가 썼다. '여기는 생전에 어머니 자연이 그에게 정복될까 두려워 떨게 만든 라파엘로의 무덤이다. 이제 그가 죽었으니 그와 함께 자연 또한 죽을까 두려워하노라.'

1519년 향년 67세로 사망한 다 빈치는 프랑스 앙브아즈성에, 1564년 향년 88세로 사망한 미켈란젤로는 피렌체 산타크로체 성당에 묻혔다. 세 대가들의 죽음으로 르네상스의 절정은 시들어 갔다. 그 산실이었던 메디치가는 방계로 피렌체에 귀환해 교황과 왕비들을 배출하며 1723년까지 존속했다.

박미영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