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창-김노주] '장마', 양극(兩極)의 화해

입력 2025-05-29 10:44:46 수정 2025-05-29 17:52:06

김노주 경북대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김노주 경북대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김노주 경북대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지금도 이념과 지역 간 대립이 심하지만 한국전쟁 당시엔 훨씬 더 심했다. 윤흥길은 소설 '장마'(1973)에서 한국전쟁 당시의 이념 갈등을 동만이 할머니와 외할머니 간의 갈등에 투영(投影)했다. 한국전쟁을 장마에 비유했고 초등 3학년인 동만의 눈을 통해 두 가족의 비극을 전했다.

동만의 가족은 섬진강 상류 마을에 살았다. 전쟁통에 서울에 살던 외할머니 가족이 피난 와서 건너방에 기거했다. 인민군 치하에서 동만의 삼촌 순철은 인민군에 협조했으나 외삼촌 길준은 뒷산 대나무밭 땅굴 속에 은신했다. 동네가 국군에 의해 수복되자 삼촌은 빨치산이 됐지만 외삼촌은 육군 소위를 달고 일선 소대장으로 떠났다.

사돈지간인 두 할머니가 한 집에 사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할머니 아들은 빨치산, 외할머니 아들은 국군이 되고 보니 두 할머니 사이는 살얼음판 같았다. 장대비가 퍼붓는 밤, 이장의 안내를 받고 온 병사들이 외삼촌 길준의 전사통지서를 동만이 아버지에게 전했다.

외할머니는 방안에서 완두 꼬투리를 손으로 우비며 중얼거렸다. "나사 뭐 암시랑토 않다. 오날 아니면 니알 중으로 틀림없이 무신 기별이 올 종 알고 있었으니께." 아들의 전사를 꿈자리를 통해 예견하고 있던 외할머니는 까무러치는 대신 나직이 "나사 뭐 암시랑토 않다"를 반복하며 애끊는 슬픔을 토했다.

이튿날 오후에도 비가 왔다. 마루에서 세찬 빗줄기를 바라보던 외할머니는 할머니가 방 안에 있는 것도 잊은 채 갑자기 저주를 퍼부었다. "더 쏟아져라! 어서 한 번 더 쏟아져서 바웃새에 숨은 뿔갱이마자 다 씰어가그라!" 이 외침이 방 안에 있던 할머니에게 비수가 되어 꽂혔다. 그 후 두 사람은 완전히 갈라선 듯이 보였다. 할머니는 빨갱이가 된 아들을 대놓고 걱정할 수 없었고 외할머니는 나라를 위해 산화(散花)한 아들을 자랑스러워할 수 없었다.

읍내에서는 야음을 틈타 또 한 차례 습격이 있었다. 먼저 습격한 빨치산들이 되레 당해 전멸했다는 소문이 났다. 경찰서 뒤뜰에 시체를 늘어놓고 연고자가 나타나면 인도해 주었다. 삼촌의 안위가 걱정된 아버지가 찾아가 거적때기에 덮인 주검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순철은 그곳에 없었다. 아버지가 빈손으로 돌아온 것은 삼촌이 살아서 돌아온 거나 진배 없는 경사였다.

아들의 무사귀환을 비는 할머니 마음을 헤아려 고모가 용하다는 점쟁이를 소개했다. '아무 날 진시'에 삼촌이 돌아온다는 점괘가 나왔다. 할머니는 희색이 만면하여 삼촌의 옷과 좋아하는 음식을 장만해 놓고 그날 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은 복잡했다. 동생이 살아있는 것은 좋은 일이나 동생이 돌아온다 해도 앞으로 겪게 될 고초가 마음에 걸렸다. 이미 형사들이 집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돌아오기로 한 날이 밝았고 진시가 다가왔다. 모두들 흥분에 싸여 기다렸지만 진시가 훌쩍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대문간이 소란스러워졌다. 동네 조무래기들이 돌멩이나 나뭇가지를 들고 몰려왔다. 그들 앞에는 사람 키보다 훨씬 큰 구렁이 한 마리가 마당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마루로 뛰쳐나오던 할머니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구렁이는 마당을 가로질러 감나무 위로 올라가 가지에 누런 몸뚱이를 둘둘 감고선 가늘고 긴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외할머니는 아이들을 물리치고 할머니가 준비해둔 물과 음식을 감나무 밑으로 차려냈다. 구렁이를 상대로 합장하고 연신 허리를 굽히며 빌었다.

"자네 보다시피 노친께서는 기력이 여전하시고 따른 식구덜도 모다덜 잘 지내고 있네. 그러니까 집안일일랑 아모 염려 말고 어서어서 자네 가야 할 디로 가소." 한참 동안 정성으로 기도하자 구렁이는 나무에서 내려와 집 뒤 장독대를 지나 대나무밭으로 사라졌다. 이로써 장마도 끝났다.

지난해 12월 3일 밤의 비상계엄에서 다음 주 6월 3일 대통령 선거일까지 여섯 달도 한국 현대사에서 장마였다. 이번 선거가 장마를 끝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잿더미에서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뤄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저력을 한 번 더 발휘하자. 대립 아닌 화해, 분열 아닌 통합으로 나아가자. 새 대통령은 양극 대신 중도를 지향하고 국민 모두를 보듬는 지도자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