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백강의 한국고대사] 당과 고구려의 격전지, 하북성 역수(易水·요수) 동쪽 당산시(唐山市) 일대

입력 2025-05-20 06:30:00 수정 2025-05-21 09:34:05

"고구려 요서 10성은 오류 아닌 역사적 사실"

고구려 요서 10성의 흔적이 남아있는 하북성 당산시 지도, 당산시 동쪽에 고구려의 평양성이 있었던 창려현, 노룡현이 보인다
고구려 요서 10성의 흔적이 남아있는 하북성 당산시 지도, 당산시 동쪽에 고구려의 평양성이 있었던 창려현, 노룡현이 보인다
중국 요녕성 지도, 요녕성 동쪽 무순시, 요양시, 해성시, 개주시 일대에 고구려 성들이 있었고, 반도사학은 이곳을 고-당전쟁의 격전지로 보고 있다.
중국 요녕성 지도, 요녕성 동쪽 무순시, 요양시, 해성시, 개주시 일대에 고구려 성들이 있었고, 반도사학은 이곳을 고-당전쟁의 격전지로 보고 있다.
한국의 반도사학이 그린 고구려와 당의 전쟁도, 당군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고구려 성들이 압록강 서쪽 요하 동쪽에 집중되어 있다.
한국의 반도사학이 그린 고구려와 당의 전쟁도, 당군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고구려 성들이 압록강 서쪽 요하 동쪽에 집중되어 있다.

◆반도사학이 부인한 고구려 요서(遼西) 10성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3 태조대왕 조에 "3년 봄 2월에 요서에 10개의 성을 쌓아 한나라 군대를 방어하였다(三年春二月 築遼西十城 以備漢兵)"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병도는 '국역삼국사기'(을유문화사·1977)에서 이 대목을 주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기 요서는 의문이다. 이를 글자대로 한(漢)의 요서라 하면 이때 한의 군현이 엄연히 존재한 요동지방을 지나 이곳에 10성을 쌓았다는 것이 되니 믿기 어렵다. 이는 필경 전성시대의 사실을 잘못 이곳에 실은 것이 아니면 지명의 오기일 것이다."

이병도는 압록강 서쪽, 요녕성 요하 동쪽에 중국의 요동군이 있었다고 여겼다. 한나라의 요동군이 요하 동쪽에 엄연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요동지방을 지나 요하의 서쪽 요서에 고구려가 10개의 성을 쌓았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그는 김부식이 역사 사실을 착각한 것이 아니면 지명의 오기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한국의 반도사학은 고구려의 요서 10성을 부인한 이병도의 관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 광복 80주년이 되는 지금까지 고구려의 요서 10성은 아예 한국사상에서 논외로 취급되어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 역사에서 고구려사의 자랑스러운 한 페이지가 송두리째 사라지고 만 것이다.

◆하북성 북경은 물론 산서성 태원시까지 공격한 고구려제국의 강대한 국력

이병도를 위시한 반도사학은 '삼국사기'의 요서 10성 기사와 관련하여 한 가지 중대한 실수를 범했다. 그것은 바로 요동과 요서에 대한 오해이다. 요녕성의 요하를 중심으로 요동과 요서를 나눈 것은 거란족이 동북방에 세운 나라가 947년 국호를 요(遼)라고 정한 이후부터이다.

한, 당 시대에는 오늘날의 요녕성에 요동군, 요서군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북성에 요동군, 요서군이 있었는데 반도사학은 이 점을 간과했다.

오늘날 우리가 고구려 제6대 태조대왕때 중국의 요서에 10개의 성을 쌓았다는 기록과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구려 제5대 모본왕 조항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는 사실이다.

"2년 봄에 왕이 고구려의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공격했는데 한나라의 요동군 태수 채동蔡彤이 우정과 신의로써 우리를 상대하자 다시 한과의 화친 관계를 회복했다.(二年春 遣將襲漢北平 漁陽 上谷 太原 而遼東太守蔡彤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여기서 말하는 북평, 어양, 상곡은 모두 오늘날 하북성과 북경시 일대에 설치되어 있던 한나라 군의 명칭이다. 태원은 산서성의 성도인 태원시를 가리킨다.

고구려가 모본왕때 하북성을 넘어서 산서성 태원시까지 공격했다는 것은 고구려 초기의 활동 범위는 오늘의 산서성 일부까지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을 무대로 하였음을 말해준다.

모본왕은 고구려의 제5대 왕이고 태조대왕은 바로 그 뒤를 이은 제6대 왕이다. 산서성까지 진출한 모본왕의 뒤를 이은 태조대왕이 즉위하여 하북성 요수 서쪽 요서에 한나라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고구려의 10개 성을 쌓았다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로서 이는 이병도의 말처럼 오기나 오류가 아닌 엄연한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더구나 고구려 모본왕때 산서성 태원시까지 공격했다는 것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쓰면서 고구려의 국력을 과장하기 위해 자의적으로 끼워 넣은 것이 아니다.

김부식은 '후한서' 동이전 고구려조에 나오는 "건무 25년 봄 고구려가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공격하였는데 요동태수 채동이 우정과 신의로써 초대하니 다시 와서 복종했다(建武二十五年春 句麗寇右北平,漁陽 上谷 太原 而遼東太守蔡彤 以恩信招之 皆復款塞)"란 내용을 단지 글자 몇 자 고쳐서 '삼국사기'에 인용한데 지나지 않는다.

이 기사는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주는 내용이다. 이것이 만일 사실이 아니라면 '후한서'의 저자 범엽이 왜 굳이 고구려의 긍지를 높이고 한족의 자존심을 깍아 내리는 이런 내용을 날조하여 삽입했겠는가.

이와 과련된 기사는 '후한서' 동이전 뿐 아니라 '후한서' 광무제 본기와 요동태수 채동열전 등에도 모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는 오류나 오기가 아닌 역사적 사실임이 명백하다.

◆요녕성 요하 동쪽 요동을 당과 고구려의 전장으로 오인한 반도사학

요녕성 요하 동쪽을 한, 당시대의 요동군으로 보는 반도사학은 지금의 요하 동쪽을 고구려와 당이 격전을 벌인 전장으로 간주한다.

'고구려의 당과의 투쟁'('한국사강좌' 고대편 제3장)이란 제목으로 쓴 이기동의 다음 문장은 반도사학의 그러한 관점을 잘 반영하고 있다.

"당군은 유성(柳城, 조양〈朝陽〉)을 거쳐서 통정진(通定鎭, 신민부〈新民府〉)으로 향하였는데 4월 이곳으로부터 요하를 건너 고구려 국경에 침입했다. 곧 고구려의 현도성(무순〈撫順〉 부근)과 신성(무순)이 적군의 공격을 받았으나 잘 막아냈다. 하지만 건안성(개평〈蓋平〉)은 장검(張儉)의 지휘하의 항호병(降胡兵)의 공격을 받아 큰 타격을 입었으며 적군 주력의 집중공격을 받은 개모성(蓋牟城, 무순 부근)은 끝내 함락되고 말았다."

"5월 요동성은 적군의 손에 함락되고 말았다. 요동성을 함락시킨 적군은 곧이어 백암성(요양 동남)으로 진출하여 이를 공격하였다. 이때 오골성(烏骨城, 봉황성)에서 1만여 명의 병사가 백암성을 구하고자 출동하였다."

"건안성을 칠 것을 주장하는 태종에 대하여 이세적(李世勣)은 작전상 안시성(해성 영성자)을 먼저 치는 것이 유리하다고 건의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반도사학은 당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고구려의 현도성, 신성, 건안성, 개모성, 요동성, 백암성, 오골성, 안시성 등이 모두 오늘날 요하 동쪽의 무순시, 요양시, 해성시 일대에 있었다고 여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도사학은 요나라의 요수와 한, 당시대의 요수를 착각함으로서 요녕성 요하 동쪽 요동이 당과 고구려의 격전지라고 오인하는 실수를 범했고 결과적으로 우리 스스로 당나라의 강역을 압록강 서쪽까지 확대하여 동북공정 이론을 뒷받침하는 우를 초래했다.

◆하북성 역수 동쪽 당산시 일대 고구려 요서 10성이 있었고 여기가 당과 고구려의 격전지였다

수양제, 당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하면서 "요수와 갈석산에 가서 죄를 묻겠다.(問罪遼碣)"라고 말한 데서 보듯이 요수와 갈석산은 고구려의 상징이었다.

당나라 시대에는 오늘날의 하북성 남쪽에 위치한 역수와 갈석산(백석산)을 경계로 당과 고구려의 국경선이 나뉘었는데, 역수가 고구려의 서쪽 국경이었다는 것은 남북조시대 대표적인 시인 왕포(王褒)가 '고구려'라는 제목으로 쓴 시의 첫 귀절에 등장하는 "스산한 역수에 물결이 일렁인다(蕭蕭易水生波)"란 표현이 그것을 잘 증명한다.

그리고 역수가 요수의 다른 이름이란 것은 남북조시대를 대표하는 문인 유신(庾信)의 시에, 형가가 진시황을 암살하기 위해 역수를 건너서 간 것을 묘사하면서 "비장하게 노래 부르며 역수를 건너갔다(悲歌渡易水)"라고 말하지 않고 "비장하게 노래 부르며 요수를 건너갔다(悲歌渡遼水)"라고 표현한 데서 잘 나타난다.

하북성의 역수가 요수이고 역수가 한, 당시대 고구려의 서쪽 국경이라면 중국의 한족을 방어하기 위한 고구려의 성들은 역수를 중심으로 그 동쪽 어딘가에 건축되었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자치통감' 당기(唐紀)에 당태종 정관 19년 "고구려를 정벌하여 현도, 횡산, 개모, 마미, 요동, 백암, 비사, 맥곡, 은산, 후황 10성을 함락시켰다(凡征高麗 拔玄菟 横山 盖牟 磨米 遼東 白岩 卑沙 麥谷 銀山 后黄十城)"라고 나온다.

한국의 반도사학은 당나라 군대가 함락시킨 고구려의 이들 10개 성 들이 모두 오늘날의 요녕성 요하 동쪽에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을 뒷받침할 아무런 문헌적 근거는 없다. 이는 단지 한족의 입장에서 역사를 해석한 중국 근현대 학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태백일사'(太白逸史) 고구려본기에는 "당나라 군대가 패전하여 무기를 버리고 도망침에 있어 역수를 건너서 갔다(唐奴多棄甲兵而走 方渡易水)"라고 말하여 역수가 등장한다.

이는 현재 요녕성의 요하가 아닌 하북성의 역수가 요수로서 당과 고구려의 국경임을 표명한 남북조시대 왕포와 유신의 시가에 나타난 내용과 정확히 부합된다.

또한 '태백일사'에는 "당태종 이세민이 안시성에 이르렀는데 먼저 당산으로부터 진격을 개시했다(世民 至安市城 先自唐山 進兵攻之)"라는 기록도 보인다.

안시성을 언급함에 있어 당산이 등장한다는 것은 하북성 역수 동쪽 당산시 일대에 한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안시성을 비롯한 고구려의 요서 10성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라고 본다.

'태백일사'는 '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하여 "태조 융무 3년에 요서에 10개의 성을 쌓아 한나라를 방어하였다(太祖隆武三年 築遼西十城 以備漢)"라고 말하고 이어서 요서 10성의 명칭과 위치를 구체적으로 밝혔다.

"안시성은 개평부(開平府) 동북쪽, 석성(石城)은 건안성 서쪽, 건안성은 안시성 남쪽, 건흥성(建興城)은 난하 서쪽, 요동성은 창려현 서남쪽, 풍성(豐城)은 안시성 서북쪽, 한성(韓城)은 풍성 남쪽, 오전보(玉田堡)는 한성 서남쪽, 택성(澤城)은 요택(遼澤) 서남쪽, 요택은 황하 북류 좌측 언덕에 있었다."

'태백일사'에서 인용한 '조대기'는 사대를 국시로 하던 조선 초기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국가에서 수거하여 폐기 처분하는 바람에 민간에서 몰래 전해오다가 100여 년 전 조선이 망한 후 빛을 본 책이다. 우리 상고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서 '조선왕조실록'에 '고조선비사', '삼성기' 등과 함께 그 책명이 전한다.

'조대기'에 나오는 요서 10성의 명칭들이 지금 중국 지도상에서 다 확인되진 않는다. 그러나 상당수의 관련 지명들을 당산시 일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안시성이 있었다는 개평, 옥전보가 있었다는 옥전현, 건안현의 변경된 지명으로 보이는 천안현, 풍성의 흔적을 간직한 풍윤, 풍남현, 건흥성이 있었다는 난주시, 요동성이 있었다는 창려현 등 1500년 세월이 흐른 지금 현대 중국의 당산시 지도상에서 고구려 요서 10성의 흔적이 묻어나는 여러 지명들이 확인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필자는 하북성 역수 동쪽 당산시 일대에 한족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태조대왕 때 쌓은 고구려의 요서 10성이 있었고 여기가 고구려와 당나라가 격전을 벌인 전쟁터였다고 확신한다.

올해로 광복 80주년을 맞는다. 이제 우리는 광활한 발해유역을 무대로 찬란한 역사를 펼쳤던 자랑스러운 바른역사를 교과서에 실어 후손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광복이다.

사대 식민사관을 청산하고 바른역사를 정립하는 일이야말로 무엇보다 시급한 이 시대 최대의 국가적 당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역사학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