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정선엔 고유명사가 되기엔 참 성의 없다 싶은, 독특한 이름을 지닌 산이 있다. 민둥산(1천119m)이다. 산 정상부에 나무가 없어 붙여진 이름이다. 대신 정상부 66만㎡에 억새가 자란다. 정선군이 9월 말부터 11월 초까지 여는 민둥산 억새축제엔 매년 30만 명 이상이 다녀갈 정도로 억새 명소로 이름이 나있다.
하지만 초록색 초원을 뽐내는 여름도 장관이다. 특히 산 정상부 '돌리네' 주변 풍경은 알프스 초원이나 제주 오름을 연상시킨다. 돌리네(doline)는 석회암 지대의 갈라진 틈으로 스며든 빗물에 탄산칼슘 등이 용해돼 나타나는 침하 지형이다. 민둥산 정상부의 돌리네는 웅덩이 형태로 물이 고이면서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이런 이유로 여름 민둥산은 2030 세대를 중심으로 꼭 가봐야 할 '포토 스폿'으로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다.
◆무르익지 않은 봄…그래도 그림 같은 풍경
민둥산을 택한 것도 연둣빛 초원을 보고 싶어서였다. 1박을 하며 야간 사진 촬영을 염두에 둔 만큼,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빛 공해'가 적다는 점도 중요한 선택 기준이 됐다.
사진촬영 장비로는 카메라 바디에 표준계 줌렌즈를 장착하고, 혹시 사용할지 모를 200m 망원렌즈와 카메라 플래시, 삼각대를 챙겼다. 무게는 7.5㎏이었다. 여기에다 1박에 필요한 장비인 텐트와 침낭, 매트리스, 발열팩을 포함한 비화식 조리도구와 음식, 식수, 헤드랜턴, 사진촬영용 텐트 조명, 보온의류 등을 더하니 70리터 배낭이 가득 찼다. 배낭을 포함한 무게는 24㎏에 달했다.
오후 3시쯤 등산 출발점으로 삼은 증산초등학교에 도착했다. 대구에서 출발해 휴게소에서 1차례 쉬고 4시간 정도 걸렸다.
이곳은 민둥산 정상으로 향하는 4가지 등산로 중 가장 인기 있는 코스다. 이곳에서 만난 한 등산객은 "태백선 '민둥산역'에서 도보로 15~2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어 열차를 이용하는 수도권 등산객이 많이 찾는다"며 "등산 시간도 1시간30분 정도로 무리가 없다"고 했다.
시원한 바람, 맑은 새소리, 상쾌한 숲 냄새를 만끽하며 산행을 시작했다. 15분쯤 오르니 등산로는 '완경사'와 '급경사' 2개의 선택지로 나눠졌다. 완만하다는 등산로를 따랐다. 배낭 무게 때문인지 이 길도 그리 만만하지만은 않았다.
1시간쯤 지났을까. 숲길이 끝나고 완만한 구릉이 펼쳐졌다. 오를수록 민둥산의 능선이 훤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따금씩 홀로 선 나무가 그림 같은 풍경으로 다가왔다.

예부터 민둥산은 정선 화전민의 근거지였다고 한다. 배를 곯던 시절 화전민들이 민둥산으로 들어와 산나물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매년 불을 놓으면서 나무가 자랄 환경이 조성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억새가 자라나 민둥산을 억새 군락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정상에 다다르니 여기저기서 "돌리네다" 소리가 들렸다. 정상 너머론 제주의 오름을 닮은 구릉이 펼쳐졌다. 사방으로는 함백산, 태백산, 가리왕산, 백운산, 노추산 능선이 넘실거렸다.
다만 기대했던 연둣빛 풍경은 없었다. 해발 1천m가 넘는 고지대인 탓에 이곳엔 아직 봄이 무르익지 않았다. 하지만 큰 배낭을 메고 오른 고생스러움을 충분히 보상하는 풍경이었다.
돌리네는 정상부 구릉 아래에 있었다. 멀리서 보는 것도 신비롭지만, 돌리네 아래로 내려가 '깊은 산 속 옹달샘' 같은 동그란 물웅덩이에서 산 능선을 비추는 반영(反影)은 더욱 신비로웠다. 물웅덩이를 한참 들여다보던 한 등산객이 말했다. "이거 완전히 컴퓨터 배경 화면이네!"

◆뜻밖의 강풍주의보…이게 백패킹 묘미
최근 MZ세대 백패커를 중심으로 'LNT(Leave No Trace)'를 실천하려는 움직임이 확산하고 있다. '흔적 남기지 않기'라는 의미로, 사람이 자연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자는 취지로 미국에서 시작된 야외 활동 수칙이다. ▷미리 계획하고 준비하기 ▷금지된 구역을 걷거나 야영하지 않기 ▷쓰레기 되가져오기 ▷자연 그대로 보전하기 ▷화기는 허용된 장소에서만 사용하기 ▷야생 동식물 존중하기 ▷타인 배려하기 등의 7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런 이유에선지 이날 민둥산 정상부에서도 등산객의 발길이 끊기는 해 질 무렵 텐트를 설치하려고 기다리는 백패커가 여럿 보였다.
오후 5시를 넘어서자 예상치 못한 일이 또 다시 일어났다. 강풍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오후 6시가 되자 등산객 발길은 끊어졌지만 바람은 더욱 거세졌고, 텐트 설치를 위해 기다리던 백패커들마저 모두 철수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이번 취재 망했구나!'
잠시 고민을 하다 사진이라도 건질 생각으로 텐트를 설치했다. 설치 장소는 정상 100m 아래에 있는 데크. 거센 바람에 날리는 텐트를 혼자서 설치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텐트에 들어가 패딩 재킷을 꺼내 입고 몸을 녹인 뒤, 발열 팩으로 데운 닭고기와 빵으로 저녁 식사를 했다.
오후 8시. 스마트폰으로 현지 날씨를 검색했다. 기온은 영상 10도, 바람은 초속 11m로 강풍주의보가 내려진 상태였다.
텐트 밖 체감온도가 궁금했다. 기상청이 발표하는 체감온도는 기온에 풍속을 고려해 산출하는 것으로 복잡한 공식이 있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이런 공식에 따라 체감온도를 계산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 보통 영하의 기온에서 바람이 초속 1m 빨라지면 체감온도는 2도 가량 떨어진다고 본다.
정선읍과 민둥산 정상의 고도 차이는 약 800m. 해발고도가 100m 높아질 때 기온이 평균 0.5~0.6도씩 낮아지는 점을 감안하면 5~6도 정도로 예상된다. 여기에다 초속 11m에 해당하는 22도를 빼면 대략적인 체감온도가 나온다. 다만 영하의 기온이 아니기에 그대로 적용할 순 없었지만, 장갑을 끼지 않고 10여분 정도 바람에 노출된다면 손이 곱을 정도의 추위였다.
오후 11시를 지나면서 바람은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다. 텐트 밖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별은 총총 빛났다. 산 서쪽 능선 가까이 기운 달이 사라진 뒤 사진을 찍기로 했다. 달이 1시간에 15도씩 기우는 점을 감안하면 달이 사라지기까지 2시간이면 충분했다.
이튿날 새벽 1시 30분 촬영장비를 세팅해 텐트 밖으로 나갔다. 언제 그랬냐는 듯 바람은 잔잔했다. 별은 더욱 빛났다. 절호의 찬스였다. 별을 점으로 표현하기 위해 셔터는 10~15초 사이로 고정하고, 노출량은 조리개와 감도로 조절했다. 그 결과 원하는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이튿날 오전 등산객이 올라오기 전 일찌감치 일어났다.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한 뒤 텐트를 걷고 자리를 정리한 뒤 다시 정상으로 이동했다. 정상 바로 옆 데크엔 예상치 못했던 텐트 1동이 설치돼 있었다. 서울에서 온 신혼부부 백패커로 어제 오후 늦게 올라왔다고 했다.
그렇게 심한 강풍에 어떻게 텐트를 칠 생각을 했냐는 물음에 아내 이지현 씨가 말했다.
"저는 늘 계획을 세우고 계획대로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남편을 만나 백패킹을 하게 되면서 꼭 계획대로 움직이는 게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좌충우돌 속에도 즐거움이 있고, 생각치 못한 돌발 상황 속에서도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예상대로만 된다면 백패킹이 이렇게 즐겁진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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